콥트어로 토마스에 따른 복음 읽기
토마스에 따른 복음
Ⲉⲩⲁⲅⲅⲉⲗⲓⲟⲛ ⲕⲁⲧⲁ Ⲑⲱⲙⲁⲥ
Εὐαγγέλιον τὸ κατὰ Θωμᾶ
Evangelium secundum Thomam
유대칠 옮김
서언
이것들은 산(ⲰⲚϨ) 예수(ⲒⲤ)가 말하고 디디무스 유다 토마(ⲆⲒⲆⲨⲘⲞⲤ ⲒⲞⲨⲆⲀⲤ ⲐⲰⲘⲀⲤ)가 적은 숨겨진 말입니다.
ⲚⲀⲈⲒ ⲚⲈ Ⲛ̅.ϢⲀϪⲈ ⲈⲐ.ⲎⲠ Ⲉ.ⲚⲦⲀ.Ⲓ̅Ⲥ̅ ⲈⲦ.ⲰⲚϨ ϪⲞ.ⲞⲨ ⲀⲨⲰ Ⲁ.Ϥ.ⲤϨⲀⲒⲤ.ⲞⲨ Ⲛ̅ϬⲒ ⲆⲒⲆⲨⲘⲞⲤ ⲒⲞⲨⲆⲀⲤ ⲐⲰⲘⲀⲤ
1. 그리고 그가 말하였습니다. 이 말들(ⲚⲈⲈⲒ.ϢⲀϪⲈ)의 뜻(ⲈⲢⲘⲎⲚⲈⲒⲀ)을 구하는 이는 죽음(ⲘⲞⲨ)을 맛(ϮⲠⲈ)보지 않을 겁니다.
ⲀⲨⲰ ⲠⲈϪⲀ.Ϥ ϪⲈ ⲠⲈ ⲦⲀ.ϨⲈ Ⲉ.Ⲑ.ⲈⲢⲘⲎⲚⲈⲒⲀ Ⲛ̅.ⲚⲈⲈⲒ.ϢⲀϪⲈ Ϥ.ⲚⲀ. ϪⲒ ϮⲠⲈ ⲀⲚ Ⲙ̅.Ⲡ.ⲘⲞⲨ
묵상
지금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토마스에 따른 복음』은 영어를 번역한 겁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토마스에 따른 복음』은 원래 영어로 쓰인 글은 아닙니다. 원래는 헬라스어로 쓰인 글입니다. 성서 가운데 신약 전체가 헬라스어로 쓰였습니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쓰여 있고요. 헬라스어는 당시 지중해 연안 전 지역의 공용어입니다. 글을 아는 이들은 모두 헬라스어를 알았습니다. 교육받은 지식인이라면 모두 헬라스어를 알았다고 보면 됩니다. 마치 동북아시아의 한자가 오랜 시간 그랬듯이 말입니다. 헬라스어로 기록하면 지중해 어디든 글 읽을 수 있는 이들은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편의를 생각해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 대부분은 헬라스어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헬라스어를 쓰지도 않았고 헬라스어를 알지도 못했습니다. 당시 헬라스어를 아는 사람은 그냥 보통의 사람이 아닙니다. 대부분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엔 당시 헬라스어를 배운 이들에게 보이는 헬라스 철학의 흔적이 없습니다. 사실 그때는 지금처럼 언어를 배우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당장 글을 배워도 글을 볼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종이가 있던 시절도 아니고, 글은 비문(碑文)이나 양피지(羊皮紙)에 적던 시절이니 말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글을 접할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도 헬라스 철학이 담긴 글을 읽은 이는 아닌 것으로 봅니다. 예수의 말은 헬라스말도 아니고 히브리말도 아니고, ‘아람어(Lingua Aramaica(링구아 아라마이카), ארמית (아라미트, Arāmît), ܐܪܡܝܐ (아라마야, Armāyâ))’이었습니다. 하지만 지중해 전체를 보면 아람어는 헬라어와 같이 대중적인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아람어로 적으면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가 아람어로 한 말은 신약으로 기록될 때 헬라스어로 기록됩니다. 『토마스에 따른 복음』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원래 헬라스어로 쓰였을 겁니다. 이를 증명할 증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대어로 번역되는 『토마스에 따른 복음』은 헬라스어를 사용해 번역하지 못하고 곱트어를 기반으로 번역합니다. 그 이유는 온전히 남은 1945년 나그 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의『토마스에 따른 복음』가 콥트어로 옮겨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가톨릭교회와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된 개신교회 그리고 동방정교회 정도가 익숙한 그리스도교이지만, 사실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더 있습니다. 바로 오리엔트 정교회(Ecclesiae Orthodoxae Orientales)입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Σύνοδος της Χαλκηδόνας, Concilium Chalcedonense), 다른 그리스도론으로 인하여 서방의 가톨릭교회와 동방의 정교회는 오리엔트 정교회의 입장을 이단으로 단죄합니다. 이에 갈라진 오리엔트 정교회는 이후로 줄곧 자기 신앙을 지키며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콥트어를 사용하는 교회 공동체로 지금의 이집트를 중심으로 유지되는 공동체인 ‘알렉산드리아 곱트 정교회(Ϯⲉⲕ̀ⲕⲗⲏⲥⲓⲁ ̀ⲛⲣⲉⲙ̀ⲛⲭⲏⲙⲓ̀ⲛⲟⲣⲑⲟⲇⲟⲝⲟⲥ, Ecclesia Orthodoxa Coptorum 혹은 Ecclesia Alexandrina Coptorum)’입니다. 서방교회인 가톨릭교회는 라틴어를 전례 언어로 사용하였다면, 동방교회인 동방정교회는 헬라스어를 사용하였고, 콥트 정교회는 콥트어를 사용했습니다. 아마도 공의회로 갈라선 451년 이전에도 이 지역 사람들은 헬라스어로 쓰인 글을 콥트어로 옮겨 읽으며 자기 신앙에 도움을 받은 걸로 보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겐 그리 익숙하지 않지만, 오랜 시간 콥트어로 신앙을 유지한 이들에겐 그렇게 낯설지 않은 콥트어로 옮겨진 『토마스에 따른 복음』이 이집트에서 발견된 겁니다.
이 글은 조금 독특합니다. 이 글은 예수가 한 말을 받아 적은 형태입니다. 누가 받아 적었는가 하면, 바로 토마스죠. 그래서 ‘토마스에 따른 복음’이란 제목이 붙인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토마스에게 말을 하는 예수를 두고 그냥 ‘예수’라고 하지 않고 ‘산(ⲰⲚϨ) 예수(ⲒⲤ)’라고 합니다. ‘살아있는 예수’라 지금 말을 하고 있다는 거죠. 그리고 그 ‘산 예수’가 한 말을 잘 궁리하여 그 참 ‘뜻(ⲈⲢⲘⲎⲚⲈⲒⲀ)’을 깨우치면, 죽음의 맛을 보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살아있는 예수의 말을 잘 깨우치면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겁니다.
사실 종교는 영원한 삶, 즉 영생(永生)을 이야기하면서 죽음의 종교가 되어 갑니다. 저는 ‘죽음’과 ‘삶’을 두고 묵상에 빠져 봤습니다. ‘죽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고정됩니다. 더는 ‘새로운 것’이 되지 못해요. 그냥 계속 ‘헌 것’으로 있는 겁니다. ‘새것’이 될 힘이 없습니다. 그럴 힘이 없으니 ‘헌 것’으로만 있는 겁니다. 이게 ‘죽음’입니다. ‘새것’이 될 힘이 없어 ‘헌 것’으로만 있는 겁니다. 그러니 ‘헌소리’만 합니다. 이젠 ‘옛것’이 되어 버린 ‘옛 슬기’만 고집부립니다. 이제 더는 새로운 힘을 가지고 우릴 새롭게 만들지 못하는 ‘헌소리’를 부여잡고 ‘헌 슬기’를 참된 지혜라 믿고 살면, 그 존재 자체도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다고 해도, 사실은 죽은 자입니다. ‘헌소리’는 결국 ‘헛소리’가 되니 말이죠. ‘헛소리’가 아니라, 알이 찬 소리가 되기 위해선 새로운 힘을 가지고 쉼 없이 ‘새것’으로 우리를 부활시켜야 합니다. 매 순간, ‘헌 것’은 죽여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때 우린 죽음의 맛을 보지 못하는 삶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 예수는 ‘죽은 예수’인가요? 아니면 ‘살아있는 예수’인가요? 선생 예수를 따라 우리는 예수의 ‘헌말’을 듣기 위해 과거로 가야 하나요? 아니면, ‘산 예수’의 ‘새말’을 듣기 위해 지금 여기 나의 자리에서 나를 돌아보며 ‘산 예수’와 대화할 준비를 해야 하나요? 지금 ‘산 예수’는 ‘옛 예수’에 머물지 않고 쉼 없이 우리와 대화하며 ‘새로운 예수’로 부활하는 예수가 아닐까요? 물론 그 대화 속에서 우리도 ‘헌 우리’에서 ‘새로운 우리’로 계속 부활할 것이고 말입니다.
제가 처음 『토마스에 따른 복음』을 읽은 건 대학생 때입니다. 20년도 더 되었네요. 그때 저는 마치 불경을 읽는 듯했습니다. 불경은 마치 석가모니(釋迦牟尼)가 강의하면 제자가 되어 그의 강의를 듣는 것 같거든요. 종종 의문이 들면 석가모니에게 묻고 그 답을 위해 불교를 더 공부하고 저 자신을 더 돌아보면 어느 순간 석가모니와의 대화 속에서 저는 새로운 답을 구해 저를 채우는 게 아니라, 비우게 되더라고요. 선생 석가모니가 제자인 저에게 알려진 새로움은 쉼 없이 비우며 이루어지는 무언가였습니다. 그런데 『토마스에 따른 복음』의 예수도 지금은 강의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토마스는 그의 강의를 열심히 듣고 기록하는 제자가 되어 있고요. 저도 그 옆자리에 앉아 예수의 강의를 듣고 ‘죽은 예수’의 말이 아니라, ‘산 예수’의 말이 되어 예수와 더불어 나도 죽지 않은 ‘산 자’로 죽음의 맛을 보며 익숙해지는 ‘헌 것’의 삶이 아니라, ‘새것’의 삶을 일구어봐야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분이든 불교 신앙을 가진 분이든 종교 자체가 없는 분이든 상관없이 만날 수 있는 저의 『토마스에 따른 복음』 묵상을 이어가 보겠습니다.
유대칠 옮기고 묵상하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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