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철학 2020 12 15
초기 동학의 역사를 기록한 <동학사>에 등장하는 1895년 서울의 평리원(재판소)에서 내부대신 박영효와 전봉준이 주고받은 문답이다.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한 박영효와 '아래부터의 개혁'을 시도한 전봉준의 만남이라 할 수도 있겠다.
박영효: 너 전봉준은 감히 도적들을 끌어모아서 난리를 일으킨 놈이다. 반란군을 몰아서 전주(‘영읍’)을 함락하고 군기와 군량을 빼앗았고, 높고 낮은 관리를 마음대로 죽이고, 나라의 정치를 감히 무례하게 처단하였다. 국가의 세금과 국가의 공금을 사사로이 받았고, 양반과 부자를 모조리 짓밟았으며, 노비 문서를 불태워 윤리(‘강상’)를 무너뜨렸다. 토지를 똑같이 나누어 국법을 혼란하게 만들었으며, 많은 군사를 이끌고 서울을 핍박하고, 정부를 무너뜨려 새 나라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므로 이는 곧 대역죄를 저지른 것이다. 어찌 죄인이 아니라고 우기느냐.
전봉준: 도(道)가 무너진 나라에 도학을 세우는 것이 무슨 잘못이오. 우리나라 사람은 스스로 찾은 도와 학문이 없고 어느 때까지나 잘되고 못되고를 떠나서 항상 남이 만들어 놓은 도와 학문만을 추구하고 의지하며 복종하는 것이 옳은 일이란 말이오?
결국 박영효에게도 전봉준은 죄인이다. 사회를 무너뜨린 죄인이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있는 조선을 무너뜨리려 한 죄인이다. 그에게 그것이 도덕이고 그것이 조선의 기본이니 그의 눈에 전봉준은 죄인이다. 그러나 전봉준은 이미 이 나라에 도가 없다고 한다. 진리가 없단 말이다. 살아가야 할 길이 없단 말이다. 남의 나라 것을 가져와서 남의 나라 것을 더 많이 아는 이들이 그들이 만든 질서로 수많은 이들을 힘들게 하며 그것을 윤리이고 도덕이라 부른 그런 지경이란 말이다. 복종을 도덕이란 나라에서 전봉준은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이야기하며, 사형이란 무서운 십자가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전하였다.
전봉준의 정신은 이 땅 독립운동의 정신이 되고 민주주의 운동의 정신이 되고 전태일의 정신이 되어 흘렀다. 예수 역시 위로부터의 혁명이 결국은 기득권을 누린 이들이 혁명이기에 온전할 수 없음을 아시고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우리에게 말해주셨고 그렇게 사셨음을 우린 안다. 낮고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희망은 2000년 전에도 100년 전에도 지중해에서도 이 땅에서도 쉽지 않은 모양이다.
낮은 자들 스스로 깨우친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깨우침으로 살아가는 개혁, 그렇게 나아가는 희망, 힘들어도 결국 이루어야 한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리라 생각해 본다.
유지승
2020 1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