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02
곁에 있어 알지 못한다. '나'도 그렇고 '나의 곁'도 마찬가지다. 나도 그들을 모르는 사이 무시하고 그들도 나를 모르는 사이 무시한다. 곁에 있어서 더 그렇다.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곁에 있는 이들 때문이라 생각한다. 사실 어디에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은 없다. 나의 마음대로는 누군가에게 아픔이고 누군가에겐 폭력일 수 있다. 그리고 나의 곁의 이들이 저지르는 마음대로는 또 나에게 아픔이고 폭력일 수 있다. 그러나 곁에 있는 이들 때문에 마음대로 살지 못한다며 곁에 있는 이들을 미워하고 멀어지려 한다. 결국 자신의 부족함과 그 수많은 실수를 안아주며 더불어 살아온 것은 곁에 있음인데 말이다.
그들에게 가지는 미안함보다 그들이 자신에게 저지른 실수를 먼저 계산하여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저런 것을 나에게 해주지 않은 나쁜 사람, 나에게 이런저런 것이 부족한 사람, 그래서 이런저런 것을 해 줄 필요 없는 그런 사람,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런저런 실수들과 약점들을 찾아 그것으로 곁에 있는 그에게 더불어 있을 필요 없는 이유들을 만들어낸다. 이런 이유들을 따지며 나는 굳이 곁에 있는 이들을 위해 노력할 필요 없는 사람이라 믿어 버린다. 그래도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이 나쁜 사람이라 내가 힘들 뿐이다. 오히려 나를 위한 상대방의 노력을 원한다.
나의 행복에 나의 곁은 방해라고 생각한다. 없었다면 나는 더 행복했을 것이라며 말이다. 지금 이 사람이 나의 배우자가 아니라면 나는 더 행복했을 것이고, 지금 이 부모가 나의 부모가 아니면 더 행복할 것이고, 지금 이 친구보다 더 좋은 친구라면 나는 행복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상황 그 상황마다 자신이 살아온 절망의 시간만큼이나 희망의 시간 역시 그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들과 더불어 울었지만 그들과 함께 웃었다. 그들로 인하여 울었지만, 그들로 인하여 웃었고, 나로 인하여 그들이 울었지만 나로 인하여 그들은 웃었다. 나의 곁에 있는 그들은 피할 수 없는 나와 더불어 있는 나를 이룬 내 존재의 조각들이다. 어쩌면 나를 위한 최선의 한 길은 바로 나의 곁을 위한 최선일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들의 곁을 나쁜 사람이라 믿는다. 그래냐 자신의 나쁨도 합리화한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사는 지혜라며 자녀와 벗에게 가르친다. 어쩌면 불행하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적을 만들어 싸우는 법을 가르칠 뿐, 벗이 되어 웃는 법은 알려주지 않는다. 왜일까? 이미 그들 자신이 벗과 더불어 삶을 모르기 때문이다. 곁과 더불어 삶을 모르기 때문이다. 곁을 적으로 두고 살아온 외로운 삶이 누구나 살아가는 삶이라 믿기 때문이다. 자기의 모든 불행은 자기 곁 때문이라 믿기 때문이다.
나는 곁의 인연들과 더불어 있다. 그 가운데 나는 진짜 나로 존재하게 된다.
나의 곁에 있음... 나와 더불어 있는 그 고마움 앞에서 나는 다시 나를 돌아본다.
너무너무 미안한 나를 말이다.
2020 10 02
유대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