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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Feb 07. 2022

참된 보살의 참된 더불어 있음

유지승의 금강경 읽기 2022년 2월 7일

4. 妙行無住分 

묘행무주분 


復次 須菩提 菩薩 於法應無所住 行於布施

부차 수보리 보살 어법응무소주 행어보시

所謂不住色布施 不主聲香味觸法布施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수보리 보살 응여시보시 부주어상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하이고 약보살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량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世尊.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불야세존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 上下 虛空 可思量 不. 不也世尊. 須菩提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수보리 남서북방 사유 상하 허공 가사량 부. 불야세존.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복덕

亦復如是 不可思量

역부여시 불가사량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


4. 집착 없는 뛰어난 행위


수부티여! 보살이란 이는 마땅히 어떤 대상에도 집착하는 마음을 흩트리지 않고 베풀어야 합니다. 즉 어떤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베풀어야 합니다. 소리, 냄새, 맛, 감촉 그리고 생각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베풀어야 합니다. 

수부티여! 보상이란 당연히 내가 베풀었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베풀어야만 합니다. 

보살이 만일 이처럼 베풀었다는 생각의 일어남 없이 베풀었다고 한다면,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입니다. 

수부티여!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동쪽 허공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당신은 잴 수 있습니까?

잴 수 없습니다. 부처시여!.

수부티여! 남쪽, 서쪽, 북쪽과 위쪽, 아래쪽 허공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잴 수 있겠습니까?

잴 수 없습니다. 부처시여!

수부티야, 보살이 형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보시를 행할 때의 복덕도 이처럼 측량할 수 없이 큰 것이다.

그러므로 수부티야, 보살이 되려고 마음을 낸 자는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베풀어줌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풀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항상 계산을 하곤 합니다. 보시, 즉 베푼다고 하지만 사실은 사업이나 장사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것을 해주면 저것을 받을 것이란 생각으로 베푼다면 그것은 참된 보시가 아닙니다. 참된 베풀어줌이 아닙니다. 싯다르타는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앞서 싯다르타는 우리에게 마음을 다스리라 했습니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말은 자기 욕심과 자기 이득을 생각하는 그 마음을 다스리라는 말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라 하고 이어서 싯다르타는 어떤 바람이나 손익 계산 없이 더불어 살아가는 보시, 베풀어줌을 이야기합니다. 입은 옷은 스님이고 신부이고 목사이면서 자기 욕심이 만든 아집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왠지 더 거룩해 보이는 옷차림에 스스로도 속은 것인지 그 아집 속에서 기도를 해 주고도 돈을 받고 복을 빌어주고도 돈을 받습니다. 신에게 드리는 것이라며 말입니다. 그렇게 항상 베푼다면서 돈을 기대합니다. 종교가 말입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일까요? 어쩌면 그냥 장사입니다. 종교 장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종교인의 그 위계적 권위 속에 숨은 위선을 참 싫어했습니다. 신의 권위를 이용해 보통 사람보다 더 성스러운 듯이 살아가면서 사실은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을 참 싫어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신도 부정하고 그런 종교도 부정하며 불교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도 그런 위선의 종교를 참으로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종교는 참 위선적입니다. 과거는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온갖 사악한 짓을 하더니 요즘은 돈에 눈이 멀어 살아갑니다. 수도 생활도 수도 사업인 세상이란 말입니다. 그것은 참 신앙도 참 수행도, 참 보살행도 아닙니다. 


제대로 된 보살의 제대된 보살행은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그리고 계산하지 않고 고통에 빠진 이들을 감싸고 도와주며 그들의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존경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고, 대가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며, 명예를 기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아집 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 속 종교를 보세요. 누구를 도와주면 얼마나 생생을 내는지요. 누구를 도왔다고 광고를 하고 사진을 찍고 심지어 고마워하길 강요합니다. 욕심으로 이루어진 선행, 그것은 선행이 아닙니다. 결국 자기를 위한 이기심의 발현입니다. 싯다르타는 마음을 다스리라 했습니다. 바로 그런 이기심을 다스리란 것입니다. 


결국 자기 아집 속에서 남들 눈에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도 결국은 불안감 속에 불행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싯다르타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그 삶도 쉽지 않습니다. 제대로 깨우치고 그 깨우침에 따라 어떤 자기 욕심도 없이 베풀며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어떤 걸림도 없는 광대한 깨우침을 삶으로 온전히 드러낸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가 되었다는 것이겠지요.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 살려 노력해야겠습니다. 항상 기억하며 그렇게 살려 노력해야겠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며 말입니다. 


진짜 보살이 되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욕심 없이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 살려 애를 써야 한답니다. 보살... 참 멋지네요. 절을 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불자도 아니지만 싯다르타 선생님의 가르침, 한번 그렇게 살아봐야겠습니다.


2022년 2월 7일

유지승 풀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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