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일상을 지내다 보면 가끔은 그런 날이 있다. 다 퇴근한 사무실에 홀로 남아 업무를 마무리하고 회사 건물을 나설 때 드는 이상한 쓸쓸함과 동시에 느껴지는 후련함, 오늘 하루도 성실히 보냈다는 안도감과 계획한 일을 어느 정도 끝냈을 때의 보람. 이미 어두워진 거리로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퇴근길의 여정.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할 때 약간 감상적인 기분이 된다. 아이패드가 든 파우치를 한 품 가득 안고 걷는 그 짧은 거리 동안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중 대부분은 버스에 오르거나 지하철을 타는 순간 잊혀진다. 하지만 아주 가끔, 문득 괜히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사랑. 그 단어를 떠올릴 때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이제는 그 얼굴을 떠올려도 아무렇지도 않지만 한때는 한 사람 때문에 퇴근길이 기다려질 때가 있었다. 한숨을 돌릴 수 있게 해 주던 오아시스 같았던 그 그림자가 기억나는 건 당연한 건데 놀라운 건 이제 없어도 아무렇지 않고, 생각의 빈도 수도 점점 낮아진다는 사실이다. 뜨겁게 사랑하는 때는 누구나 한정적이지만 사랑의 형태가 변할 뿐 그 사랑만은 오래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런 내 예상을 너무도 빗나갔던 그 끝. 기분 나쁜 추억도 아니고, 생각하면 서글퍼지는 이별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아주 미묘한 기분으로 안녕을 말했던 기억이 난다. 사진 하나, 환히 웃는 그 얼굴 하나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던 때도 있었는데 그토록 담담해지고 아무렇지 않다 못해 무감각해질 줄은 스스로가 제일 몰랐다. 한순간의 감정은 아니었지만 평생의 감정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아주 깊은 감정으로 그 기간을 좋아한 나 자신에게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시간 흐름에 따른 감정의 변화에 수긍하게 된다. 분명한 사실은 아주 많이 좋아했다는 사실이고 그걸 후회하지 않으며 내가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뿐이다. 믿기지 않게도 한 사람 덕분에. 그런 존재가 이제 더 이상 내게 아무것도 아니게 된 사실이 아이러니하지만 사랑의 변속성을 생각해보면 그리 놀라운 일만도 아니다.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는데 마음은 생각보단 변화무쌍해서 이렇게 가끔은 말도 안 되는 감정에 빠지기도 하고 나의 새로운 면을 매 순간 발견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는 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변덕스러운 사실이 썩 탐탁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자의였으면 선택하지 않았을 것들로 인해 아주 커다란 행복감을 느끼고 내 삶의 방향을 크게 바꿔 놓고는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란 변화의 동의어라고 생각한다. 사랑해서 변화하고 싶고,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 사랑으로 인해 나의 많은 부분에 늘 도전하고 좌절하고 뜻밖의 수확을 얻고는 기뻐한다.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수많은 도전들의 시작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은 근본은 나의 애정과 맞닿아 있다. 그렇기에 한평생 사랑하고 도전하고 매일의 일상 속에서 애정과 외로움을 발견하며 살아갈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기대되는 것은 역시나 그 변화의 방향을 전혀 가늠할 수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