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초여름, 사 년간 다녔던 첫 직장을 그만두고 태국으로 떠났다. 치앙마이-양곤-방콕을 거쳐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이 주간의 여정이었다. 최근 갔던 여행 중에 제일 좋았었다고 자부할 만큼 기억에 남는 여행이었는데 왜 그렇게 좋았냐고 묻는다면 내가 편안히 숨 쉬게 해 줬던 시간들이라 좋았다고 답할 것이다. 처음 치앙마이에서 홀로 지냈던 일주일이 특히나 내게 아주 인상적인 추억으로 남아있다. 서울에 비하면 아주 작은 소도시, 근처에 바다도 없고, 초호화 리조트도 없다. 더불어 오락시설이나 특별한 관광지도 거의 없다. 그러나 작지만 다양한 매력으로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고 오래도록 머물고 싶게 만드는 도시. 맑은 하늘과 선선한 날씨, 저 멀리 보이는 도이 인타논이 매력적인 도시. 여유와 활기가 동시에 있는, 카페의 천국. 여행의 진정한 묘미를 일깨워줬던 여행이라 아직도 내게는 최고의 여행지이자 깊은 인상이 남은 여행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까마득하고 머나먼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코로나 이전, 그러니까 일을 시작하고 나서 몇 년 동안 정말 중독처럼 해외여행을 갔다. 함께 갈 때도 있었지만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서 대부분 홀로 하는 여행이었다. 혼자 여행 가면 좋냐고 묻는 친구들에게는 그냥 그렇다고 답했다. 실은 혼자라서 좋고 나쁘고를 따질 수 없을 만큼 나는 지쳐있던 상태였다. 너무 답답해서 숨을 쉬기 위해 나갔다. 내 연차에 비해 주어진 일의 무게감은 너무 심했고 다들 불안한 시기라 그런지 주변의 관계에서도 딱히 위로를 찾거나 안정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 내게 조금이라도 신선함을 주는 게 바로 해외여행이었다. 마침 그 당시에 저가항공들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일본, 대만 등 가까운 나라로 가는 비행기표는 아주 싼 값에 나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 작은 월급으로도 일 년에 몇 번씩 해외여행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딱 여행할 때만 좋고 혹은 여행할 때조차 일순간 찾아오는 고독에 목이 메이거나 이유 모를 답답함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 미리 구매해두었던 면세품을 찾고 라운지에서 비행시간을 기다리는 그 순간은 너무 설레고 행복한데 막상 비행기를 타면 그 설렘은 반으로 줄어든다. 낯선 공항 혹은 자주 가서 익숙한 타지의 공항에 발을 내딛는 그 찰나, 나를 엄습하던 이국의 공기와 그 안에서 느껴지던 쓸쓸함. 그런 감정을 안고도 매번 나갔던 이유는 간단했다. '해방감'때문이었다. 국내에 있으면 진정한 나를 찾지 못한다거나 내 삶이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해외로 나가게 되면 내 일상에서 완벽히 벗어났다는 일탈 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낯선 환경, 공기, 이국의 언어, 나를 알지 못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 쌓여 있으면 답답함이 가시면서 해방감이 느껴졌다. 혼자의 즐거움과 불쑥 튀어나오는 고독의 양면성을 동시에 알게 된 것도 이즈음이다. 혼자 여행을 하면 많이 돌아다니게 되거나 혹은 아주 질릴 정도로 게으름을 피우게 된다. 이국의 거리를 걸을 때마다 낯선 언어가 내 피부에 스미는 느낌이 좋았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언어 향기 조차도 내게 자유로움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영어권이 아니어도 짧은 영어면 생활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바디랭귀지로도 충분히 잘 통했고 이따금씩 스쳐가는 인연들과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언어적 한계가 불편하면서도 완벽히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상한 재미를 주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는 아무리 영어를 공부해도 한국어의 뿌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건 어느 나라에서 왔건 영어권 출신이 아니라면 누구나 모국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한국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변환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그들도 그런다는 사실에서 묘한 공통점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누는 대화의 폭은 넓었고 한국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테지만 마음을 여는 것도 상대적으로 쉬웠다. 이것 또한 여행이 주는 묘미였다. 그러다가 밤이 찾아와서 홀로 잠들 때면 이따금씩 내가 한국에 두고 온 일상들, 며칠이 지나면 다시 돌아갈 내 백그라운드가 생각나면서 덜컥 겁이 나거나 속이 답답해지기도 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여행지에 머무는 것이 한 여름의 홀리데이 라면 한국은 내겐 치열한 일상이었으니까.
그 일상을 잊으려 떠난 여행지에서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올린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그 아이러니함 마저 즐길 수 있게 되었을 때 다시 나의 루틴 한 삶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반복하곤 했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일정치 않았지만 본질만은 같았다. 그 작은 일탈이 나를 숨 쉬게 해 줘서, 아주 작은 해방감이 내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줘서. 사실 이유가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중요한 것은 내가 여행을 좋아하고, 가서 아주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또 한편으로는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무언가를 비워서 그 도시에 내 마음 일부를 남겨두고 온다는 사실뿐인데.
일 년에도 몇 번씩 공항에 가면서 느꼈던 설렘을 아직도 기억한다. 여행지에서 느꼈던 고독이나 아이러니하게도 종종 느끼곤 하던 한국에 대한 향수, 일상이 아님에도 내 일상처럼 느껴지던 짧은 휴가들. 그 시간들이 있어서 나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알아갈 수 있었다. 너무 힘들 때는 도리어 여행을 가지 않는 것이 내게는 더 좋다는 것, 여행의 적절한 때는 없다는 것, 여행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 회피성 여행 말고 내가 정말로 원했을 때 여행이 더 즐겁다는 것, 혼자로써 충분히 즐겁다는 것, 그럼에도 외로움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고 그건 외로움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을 탐구할 때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낯선 고독 비슷한 것이라는 사실. 모두 다 내가 수도 없이 떠나고 돌아오는 여정을 반복하며 깨달은 것들이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내 삶이라는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다. 익숙하게 자리 잡은 루틴과 일상의 여행 속에서 다시 짧은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쩌면 내 인생의 여행자로서의 예정된 숙명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