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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Jan 17. 2022

나의 고독은

박준 시인의 에세이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감정 같아.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일 텐데,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드는 그 감정이 외로움일 거야. 반면에 고독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고독해지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외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야.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러다 다시 금세 고독해지기도 하면서.’


이 구절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간 내가 느껴왔던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가 모두 설명되는 느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사람이라면 외로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고독하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누군가를 곁에 두었기 때문에 생긴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는 황경신 작가의 말처럼 존재는 부재로써 증명되고 부재는 그 이전의 삶과 어쩔 수 없는 비교를 야기한다. 그래서 쭉 혼자 있었으면 몰랐을, 외로움이란 감정이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빼곡히 메우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같이 있지 않아서 외로운 것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함께 있어도 외롭다면 사람은 누구나 감정의 바닥을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를 곁에 둬도 외롭다면 그건 외로움이 아니고 더 나아가 외로움의 본질도 아니다. 스스로의 고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을 외로움으로 정의하게 된다면 그 누구를 만나도 그에 따른 간극은 채워질 수가 없다. 고독은 내가 나를 똑바로 마주해야 서서히 옅어지며 이 감정의 진가를 알 수 있다.


나의 고독은 항상 예고도 없이 찾아왔고 그 고독은 언제나 나의 시야를 바꿔놓았다. 인간관계에 지쳐서 피곤하거나 다 그만두고 싶을 때 종종 찾아오던 그 시간들은 내게 뜻하지 않은 위로와 해결의 실마리를 주곤 했다. 자칫하면 외로움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는 그 시간들이 외롭지 않다고 느꼈던 것은 그 안에서 느껴지는 묘한 해방감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고독하다는 것은 그만큼 내면에 나만의 방이 많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 수많은 방을 하나씩 들어가 보며 내 취향대로 꾸미고 물건을 채워놓는 것. 그게 우리가 고독과 만나서 고독을 비우고 채워나가는 방식이다. 외로움은 그 중심이 타자에게 있지만 고독의 본질은 내 안에 있다. 고독을 즐기는 레벨이 되려면 멀어서 방법을 논하긴 민망스럽지만 적어도 타자 중심의 사고보다는 내 안의 본질을 만나고 그를 위해 사유하는 것이 조금 더 무게의 중심을 잡는 방법이 아닐까.


누구나 필요한 나만의 시간, 나의 솔직한 감정과 깊은 마음을 만나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그 시간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보다 혼자를 즐길 때 더 자주 찾아온다. 외롭다는 이유로 무작정 사람들을 만나거나 여기저기 상처 입은 관계들에 매달리는 대신 부산스러운 관계와 성별, 나이, 결혼 유무에 따라 한정되는 그 역할에서 벗어나자. 나는 나로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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