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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Jan 15. 2022

버티는 삶에 대하여

 처음으로 '버틴다'는 의미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때는 첫 회사에 인턴으로 입사했을 무렵으로 기억한다. 모든 것이 낯설고 스스로에 대한 의심만 짙어지던 때에 계속 스스로에게 되뇌었었다. '지금 여기서 못 버티면 아무데서도 버티지 못할 거야.' 이 짧은 한 문장이 터널 같았던 인턴 시기를 버티게 해 줬었다. 터널 진입 전에는 신났던 그 마음이 아주 희미한 주홍빛 전등에만 의지해서 터널 밖을 나가기 위해 묵묵히 걸으면서 점점 사그라드는 것을 선명히 느꼈었다.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모든 것에 서툴었으며 아무런 경험 값도 없었던 때라 버티는 것 만이 내가 온전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함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몇 년차가 되든 모르는 것은 계속 나올 것이고 평생 배우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모든 것이 아득해 보이기만 했었는지. 이렇게 회상할 수 있는 것도 그때의 버티는 삶을 건너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사실 나는 지금도 버티고 있다. 새로 시작한 업무는 낯설기만 하고 내가 하고 싶었던 업무라는 것 외에는 지금으로선 아무런 메리트도 없다. 기약 없는 미래의 효용성을 위해 나는 또 '버티고' 있다. 매 순간이 어떤 것으로부터, 나를 둘러싼 고난과 시름, 걱정으로부터 버티는 삶이다. 딱히 거침없이 공격하는 삶을 살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이토록 방어에만 치중한 삶을 살아가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김종완 작가의 독립출판물 '커피를 맛있게 마셔서 잠이 오지 않으면' 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불안은 안정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 집착'


이 구절을 읽고 그때 그토록 불안함을 느끼고 버티는 삶에 치중한 이유를 알았다. 그때의 나는 얼른 안정을 되찾고 싶었다. 하루빨리 업무에 적응하고 싶었고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으며 내 포지션에 녹아들어 안정적인 무언가를 얻고 싶었다. 함께 대학에 다니며 즐거웠던 시간을 지나 각자의 삶의 방향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기여서 더 그랬다. 대부분은 취업을 준비했고 일부는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으며 아주 소수는 유학을 가거나 혹은 아예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다 함께 같은 울타리에 있다가 너도나도 안정을 위해 걱정을 한가득 풀어놓으며 제 각기 우왕좌왕 흩어지던 그 무렵. 모든 게 혼란스러워서 안정과 행복에 집착했다. 행복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행복보다는 불안을 크게 느끼는 내 상태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불안감은 배로 심해졌다. 불안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다 내게 피로하게 다가와서 그저 버틴다는 생각 외에는 할 수 없었다.


무엇으로부터 버티는 삶이었냐면, 아마 나 자신으로부터 버티는 삶이었을 것이다. 버티는 건 나쁜 게 아니라 어떻게 보면 사람의 능력이지만 버티기만 하다 보면 종국에는 버티는 목적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냥 버티는 삶만 남을 뿐이다. 사람이 견디고 버티는 이유는 모두 스스로를 위함인데 그 목적 자체가 사라지기 쉽다. 그래서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어땠지. 오늘도 나 자신을 견디는 것에 치중한 하루였나. 때로는 버티는 삶을 살아가는 게 필요하고 삶의 맷집도 키워주지만 억지로 버티는 삶을 오래도록 지속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너무 행복에도 집착하지 말고, 그냥 흐름에 맡기면서 조금은 편안하게 흘러 보내는 삶을 살아보자 다짐하며 칠 년 전의 내가 썼던 글을 복기해본다. 더불어 7년 전의 자문에 지금의 내가 내린 결론은, Yes이다. 모든 삶은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를 지니기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다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지금 서 있는 이 거리 위에서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 나한테 일상이 언제 이렇게 버텨야만 하는 것, 견뎌야만 하는 것,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가운데서 살아남겠다고 하기 싫은 일을 아등바등 붙잡고 있는 것이 되었나 싶어서 씁쓸하다.


지금도 애매한 신분이긴 하지만, 학생 때에는 모든 게 막연했기 때문에 잘 될 거라고 무의식 중에 생각했던 거 같다. 88만원 세대라고 매스컴에서 연일 떠들어 댈 때에도 나는 아니겠지, 나는 저것 보단 많이 벌 거야, 나는 돈도 많이 벌고 행복할 거야-. 이런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생각만 하면서 친구들과 밝고 환하고, 좌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아니 좌절이란 요소가 삽입되어 있어도 충분히 극복 가능한, 극적인 느낌을 더해주는 요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그 실체의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그저 마냥 좋은 핑크빛 미래에 대해 떠들 때의 나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지금은 그 누구도 밝은 미래를 얘기하지 않는다. 입을 열면 현실적인 고민들이 쏟아져 나오고 현실적인 고민은 곧 걱정과 불안의 미래가 된다.


너는 잘하고 있어. 너는 잘할 거야. 그런 위로는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는 것도, 내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해줘도 그들이 믿지 못하는 지금의 현실도 모두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는, 아니 나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고 이런 일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낙오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그게 참 씁쓸하다. 이래서 사람들이 노희경 드라마를 웰메이드 드라마라고 칭하는데도 시청률이 그렇게 낮은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너무 현실적이라서. 그녀의 드라마는 너무 현실적이고, 현실의 부조리함과 억울함, 괴로움 등을 여과 없이 표현한다. 꿈과 환상을 심어주는 허황된 얘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 그것을 그대로 투영하는 드라마를 사람들이 달가워할 리 없다. 웰메이드라는 것을 알면서도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수긍만 할 뿐 정작 보지는 않는 것이다. 흔한 소재에, 재벌, 불륜, 출생의 비밀 등과 같은 막장적인 요소가 있는 드라마를 보는 것도 어쩌면 일종의 현실도피일지도 모른다. 현실과는 전혀 관계없는 얘기라 욕을 하더라도 편하게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나 취업만을 위해 달릴 때는 하지 못했던 생각. 과연 나는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한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부모님의 체면을 위해, 사회적인 내 지위를 위해, 행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그냥 버틴다는 느낌으로 사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결론적으로, 이렇게 살아서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2014년 늦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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