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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Jan 04. 2022

승진, 꼭 해야 하나요? (1)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당시 나의 직속 상사는 회사에서 까마득하게 높은 사람이었고 이제 막 신입사원 딱지를 뗀 삼 년 차의 나에게는 어려운 분이었다. 내 생애 이런 상사를 만나는 건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무척이나 좋은 분이었지만 직급 차이와 직속 상사라는 사실 때문인지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그분이 무척이나 어렵게만 느껴졌다. 단 둘로 이루어진 부서라 필연적으로 함께 일하는 부분이 많아서 서로에게 익숙한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때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지금도 일하는 방법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때의 나는 조금 부족한 소프트 스킬을 무작정 체력과 에너지를 갈아 넣어서 채웠다. 회사를 다니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딱 세 가지다. 일(직무), 연봉(+복지) 그리고 사람. 연봉은 매우 쁘띠 한데 업무도 많았던 첫 회사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상사가 너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업무 처리 방식과 인성적인 면에서 모두 배울 점이 많은 분을 상사로 둔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아서 이 기회를 가능하면 오래 누리고 싶었다.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상사에게 힘이 되는 부하 직원이 되고 싶었다.


첫 회사는 국내 기업이라 특진이나 특별 인사발령을 제외한다면 직급별로 승진하기 위해 필수로 채워야 하는 근속연수가 있었다. 사원에서 주임이 되려면 공식적으로는 삼 년, 적어도 이년은 넘겨야 했다. 당시 인턴을 포함하면 삼 년 반을 일한 상황이라 이미 나는 승진대상자에 올라가 있었다. 승진 철이 되자 슬슬 부추기는 말과 견제하는 말이 동시에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본인 얘기가 아니라고 참 쉽게들 내 미래를 말했다.


‘이번에 주임 되는 거야?’

‘네가 승진 못하면 누가 승진하냐? 미리 축하한다.’

‘너 승진하면 일이 더 많아지는 거 아냐?’

‘네가 일을 잘하는 건 알지만 아직 승진하기엔 조금 덜 여물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년쯤 하면 어떠니?’

‘아직 주임 달기에 조금 어리지 않나?’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승진을 원하는 사람은 아니다. 세상에 승진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어!라고 묻는다면, 여기에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가치들이 있고 나는 회사 생활에서 승진보다는 다른 일을 더 우선순위에 두고,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승진은 그저 내가 위의 직급으로 승진한다는 단편적인 사실이 아니다. 아주 많은 변화와 더 무거운 책임 및 의무를 반드시 동반한다. 승진을 한다는 건 그만큼 내가 책임질 것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단순히 연차가 되어서, 전형적인 한국식 사고방식처럼 나이가 많아서 승진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게 주어진 책임의 무게를 견디며 업무를 쳐낼 준비가 된 사람이 해야 하는 게 승진이라고 믿는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해 승진하지 못했다. 목표 매출액은 달성했음에도 임원진들 사이에서의 묘한 알력 다툼으로 인해 본부별 경쟁이 심화되었고 본부별 성과 아래, 암묵적으로 승진시킬 수 있는 사람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다. 내 상사는 모든 이의 요청을 받아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입장에 있는 분이었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본인의 바로 밑에 있는 나를 챙길 여력은 없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항상 본인보다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분이었으니 당연히 본인의 직속 부하직원보다는 다른 팀을 챙기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도 모두 나의 추측일 뿐이니 상사의 눈에는 단순히 내가 아직 승진하기에는 이르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그 해 인사고과는 늦은 밤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발표가 났고 동기들 중에 승진을 하지 못한 사람은 나를 포함한 단 둘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우리 둘은 매우 친한 사이였다. 그 의미인즉슨 일만 열심히 하고 잘 해내면 될 거라고 생각한 바보 둘이었다는 뜻이다.


승진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승진자 명단은 나를 울적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회사라는 조직이 다분히 정치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해 프로모션은 정말 그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단순히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게 회사 생활이다. 그다음 날 출근한 회사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인사고과 철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고 아침 회의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시작됐다. 회의 직후, 필요한 결재 때문에 자료를 가지고 점검을 받으러 간 자리에서 평소와 같이 업무 보고를 하고 준비한 자료를 전달하고 나오려는 찰나, 등 뒤에서 상사의 말이 나를 붙잡았다.


“우리 썸머도 승진해야 하는데 미안하다. 내년에는 너도 승진하자.”


아니라고 짧게 얼버무리고 그 방을 나오는데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울적해졌다. 분명 나를 챙겨주는 말이었는데 왜 그렇게 마음이 상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승진을 바란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승진을 하면 승진을 했다고 주어질 무거운 책임감과 의무가 싫어서 승진하기 싫었는데 왜 그랬을까. 아무리 묵묵히 일해도 결국 회사라는 곳은 본인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먼저 들어준다는 걸 새삼 다시 깨달아서일까. 아니다 그런 이유 만은 아니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존경하고 최선을 다해 일하던 상사에게 나는 우선순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당사자에게 확인받아서 마음이 상했던 게 아닐까. 그 누구도 그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그렇게까지 하라고 하지 않았고 좋은 분이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노력한 거였지만 아마 마음속에서는 나도 모르게 헌신적인 내 마음에 대한 보상 심리 비스무래한 감정 혹은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나 보다. 그 어떤 것도 섣불리 기대해서는 안 되는 정글 같은 회사 생활의 생리를 알기에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고, 사람을 지나치게 신뢰했으며, 업무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헛똑똑이었다. 물론 업무를 잘 해내는 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그때의 내가 지나치게 순진했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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