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단 세 글자만으로도 쉽게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게 만드는 마법 같은 단어다. 두려움은 매일 나를 쫓아온다. 두려움을 피해 달아나기를 벌써 2n년째. 내가 기억이 없는 기간을 제외한다면 두려움은 꼬리표처럼 나를 따라오곤 했고 어느 순간은 나를 순식간에 잡아먹기도, 또 어느 날은 발끝부터 야금야금 나를 조용히 잠식할 때도 있었다. 운이 좋은 어느 날은 아주 멀리 달아날 수 있었고, 아주 가끔은 두려움을 저 멀리 떼어놓은 채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두려움과 보낼 수밖에 없었고 아주 많은 시간을 두려움을 피해 달아나는데 소비했다. 두려움을 마주 안으면 생각보다 별 거 아닌 거라는 것을 깨달은 지 꽤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두려움이 커진다 싶으면 냅다 도망치고 싶은 생각부터 들었다. 내가 도망가면 도망갈수록 그 크기가 점점 커지고 쫓아오는 속도에도 가속도가 붙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두려움은 쉽게 환영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으니까.
요즘 또다시 두려움이 그 몸집을 부풀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두려움을 두려워하면서 회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진 두려움을 언젠가는 돌아보고 그 손을 잡고 무거운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피하고만 싶어지는 그 시기는 꼭 찾아온다. 언제까지고는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언제까지'라도 외면하고 싶어 진다.
‘뭐가 그렇게 두렵니?’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두려워.’
‘다 내버려 두고 도망치고 싶어. 하지만 나는 그것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야. 이제 그것마저 두려워.’
‘그게 답이 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이미 네 안에 답이 있다는 게 보여.’
스스로와의 대화를 마치고 이제 내 뒤에 넘실대는 두려움을 비로소 마주한다. 실눈을 뜨고 그 크기를 가늠하다가 결국은 두 눈을 모두 뜨고 마주한 두려움은 생각보다 작다. 넘실대는 그 기운 속으로 손을 뻗고, 팔을 벌린다. 한 걸음, 그 안으로 마주 걸어 들어간다. 그렇게 두려움을 마음 가득 안고 그 넘실대는 기운을 떨쳐버리려고 달릴 준비를 한다. 운동화 신은 발을 두어 번 지면에 툭툭 치고는 익숙한 마음의 통로를 따라 달린다. 두려움을 안고, 나는 오늘도 달린다. 계속. 또 다른 두려움을 마주하게 될 때까지, 그렇게.
두려움 때문에 잘 해낸 일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신입 때부터 지금까지 일은 내게 좋아하면서도 두려운 것, 하고 싶으면서도 하기 싫다는 양가적 감정을 느끼게 하는 평범하고도 특별한 무언가 이다. 두려워서 어떻게 해서든 맡은 것은 책임지고 끝내려고 노력했다. 좋든 싫든 내게 주어진 것은 야근을 해서라도 했고, 성실하게 붙잡고 있었다. 종종 매체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시간을 단 1분도 허투루 쓰지 않고 고효율적으로 일한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일한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일에 대한 내 감정과 상관없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두려움을 베이스로 못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내 자존심이 주된 이유다.
'도움 안 되는 경험은 없다.'라는 게 나의 오래된 신조이자 여기까지 나를 이끌어준 말이었다면 높은 업무 강도와 힘든 경험도 견디게 해 준 것은 두려움 덕분이었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생각, 주어진 것을 잘 해내고 싶었던 열망, 나와 맞지 않고 재미없지만 내가 맡은 일이니까 끝까지 해야 한다는 책임감 그리고 매일의 출근길,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보이던 우뚝 솟은 회사 건물을 바라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들었던 두려움과 막막함. 그 감정들을 헤치고 지금까지 왔다. 사회생활은 언제나 어렵고 고되지만 이제 신입사원 시절이나 이직 직후 나를 먹먹하게 했던 두려움은 조금 옅어졌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적응의 시간을 거치고 나면 조금은 기계적으로 출근하고 일한 뒤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을 한다. 금요일에는 별 것 없어도 기분이 좋고, 주말은 달콤하지만 금세 지나가버린다. 그 사이에서 불쑥 이상한 두려움이 치고 올라오지만 이제는 그게 습관적인 감정이자 하나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안다. 큰 일을 앞두고, 주요한 변화를 마주하기 전, 혹은 내게 새롭게 주어진 큰 무게감을 짊어지게 되었을 때,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이 두렵다.
두렵다고 해서 하지 않을 이유도 못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안고 그게 뭐가 됐든 일단 시작한다. 수많은 실수와 시행착오 끝에 일과 변화에 적응하고 당연한 수순처럼 인정받고, 조금씩 발전시켜나가다 보면 또 다른 두려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끝이 없다. 하지만 끝이 없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내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 끝이 없는 두려움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려운 발걸음을 떼면서 내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뿐이다. 정신없이 일에 코를 박고 있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면 어느샌가 두려움은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져 있고, 그 출발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앞으로 나와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런 과정을 안다고 해도 두려움의 바다에 나를 내던지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 이면을 알고 있으니 나는 여느 때처럼 망설이다가 다시금 그 파도에 몸을 맡길 것이다. 그렇게 일을 하고 성과를 내고 한편으로는 좌절도 하면서 앞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