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에 사직 의사를 밝혔을 때 제일 많이 들은 말이 ‘네가 퇴사할 줄 몰랐다.’라는 말이었다. 그만큼 성실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일했다. 아마도 이십 대 초반, 인턴부터 시작한 첫 직장이라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서 헌신적으로 일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조금이라도 경력이 있는 상태에서 그곳으로 이직했거나 조금 더 나이를 먹은 후 입사했더라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데다가 여러 가지 일이 끊임없이 발생했었지만 첫 직장이라 그런지 그 의미가 남다르고 퇴사한 지 사 년 정도 지난 지금까지도 그곳을 떠올릴 때마다 그리움이 먼저 든다. 퇴사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섭섭함을 표했다. 아마도 오픈 멤버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내 포지션에 대한 업무를 비로소 다 세팅하고 궤도에 오른 네가 왜 그만두냐는 말부터 섭섭하다는 말까지 아주 다양한 반응을 보고 들었지만 제일 나를 어이없게 만들었던 것은 다른 부서 팀장님의 말이었다.
‘여기 계속 있으면 전무님이 너 승진도 시켜주고 앞으로 다 챙겨주실 텐데 왜 그만두니?’
회사는 승진을 위해 다니는 곳인가? 무조건적으로 승진만이 의미가 있나? 나쁜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름의 섭섭함과 나에 대한 걱정으로 말씀하신 것은 알지만 그때 당시는 정말 짜증이 났다. 그렇게 아무것도 바란 것 없이 일했는데도 회사 사정 때문에, 혹은 내가 떼쓰지 않고 바라지 않아서 밀려났었는데 올해 말은 그러지 않다는 보장은 없지 않으냐고 되묻고 싶었다. 회사는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곳이고 내 업무 능력과 연봉을 등가교환하는 곳이다. 승진을 하면 좋겠지만 승진 외에도 너무나 많은 요소와 추구할 수 있는 가치들이 있고 나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다. 그 누구도 나를 챙겨주리라 기대해서는 안된다. 첫 회사를 다니면서 여러 업무를 해볼 수 있었고 때로는 그 업무가 내 어깨를 짓눌러서 무척이나 힘들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해야만 한다고 믿어서 혹은 내가 좋아서 한 일이었지 승진이나 내 안위를 위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승진과 내 안위가 전부라는 식으로 일축해버리는 것은 정말 기분이 상했다. 그렇게 사 년이나 다닌 첫 직장을 떠났다.
이직은 지금까지 딱 한번 했다. 첫 직장 이후에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로 이직하고 지금까지 다니고 있으니 이쯤 되면 나와 이직은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겠다. 어린 시절, 무엇을 하든 1년은 해야 한다고 했던 엄마의 가르침 덕분일까. 전혀 다른 업계와 직군으로 이직했음에도 경력을 인정받아 직급을 올려서 이직했지만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도 쉬운 곳은 절대 아니다. 외국계 회사라 직속 상사가 있는데 해당 라인별로 라인 매니저는 또 따로 있는 상황이었고 분위기도 판이하게 달랐다. 회사는 정말 끊임없이 사람을 시험한다고 느낀 것도 이직한 직후였다. 업무 실수도 아니고, 내 잘못이 아닌, 서로의 다툼으로 인해 기분 상하는 것은 기본이고 자존심에 생채기도 여러 번 나다 보니 여러모로 인정받았던 첫 직장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렇게 일 년을 조금 넘게 보냈을 때, 직속 상사가 한국인에서 외국인으로 바뀌었다. 내 직속 상사이자 한국 오피스의 수장이 된 상사는 젊은 영국인이었고 한국 오피스의 대표가 되기 전까지는 한국에 와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첫 직장에서 첫 업무도 영어 사용 빈도가 꽤 있던 직군이라 외국 동료들과 일은 꾸준히 해왔지만 내 직속 상사가 외국인이 된 것은 처음이었다. 간단한 이메일 업무는 꽤 익숙했지만 대게 영어 업무는 콜보다 이메일과 메신저 대화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영어로 백 퍼센트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부담감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직속 상사이기 때문에 업무 보고도 주기적으로 해야 하고 앞으로 일상 전반에서 영어를 사용해야 할 텐데, 어떡하지? 현실적인 걱정이 먼저 앞섰다. 지금도 영어에 대한 부담감은 여전하지만 그때는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까지 겹쳐져서 그 강도는 배 이상이었다.
외국계 회사는 보통 4월이 인사고과 시기이다. 이때 승진과 연봉 인상, 보너스 지급 등이 모두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서 농담으로 ‘잔인한 사월’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작년 4월. 코로나로 인해 모든 채용 프로세스가 중단되고 연봉은 동결됐다. 그 와중에 승진은 단 세 명만 했는데 그중에 한 명이 나였다. 보통 승진을 할 때는 직속 상사와 면담을 하거나 상사가 미리 언질을 주는 게 보통인데 아무런 것도 없이 발표 직전에야 알아서 무척이나 당황했었다. 일단 새로운 외국인 상사와는 단 2개월만 일했던 상황이었고, 매니저라는 직급은 부담스러웠으며 그때 막 새로운 업무를 떠맡아서 신입 사원이 된 것처럼 우왕좌왕 일하고 있던 때라 당황스러움은 배로 부풀었다. 그때 당시 보스는 가족일 때문에 홍콩에 있었던 상황이라 발표가 나자마자 보스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Are you available to talk? Sure. 답은 빨리 왔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나 이번 프로모션에 대해 질문이 있어.”
“뭔데?”
“내 승진이 이해가 안가. 개인적으로 매니저라는 직급은 본인이 맡은 직무와 필드에 대해 폭넓은 이해와 지식, 스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나는 이제 막 새로운 업무까지 시작했고 이쪽에서는 신입사원이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너 정말 내가 그 정도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다고 확신하니? 승진 이유를 말해줄 수 있을까?”
“난 네가 잘할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아. 지난 두 달간 네가 보여준 태도와 너의 업무 능력으로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승진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마지막은 농담 섞인 말로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승진했다는 사실이 얼떨떨했다. 내가 잘할 수 있을지 의심도 들었고 이 직급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발표까지 난 승진을 물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내가 직급에 맞게 일하고 있는가, 라는 의심이 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승진은 반드시 그 책임과 의무가 뒤따르는 일이고 직급에 맞는 퍼포먼스를 내는 것은 아주 당연해서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다. 그래서 승진이 달갑지 않은 것도 있었다. 책임과 의무를 지기 싫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무거워진 책임과 의무, 회사의 기대를 짊어질 만큼 내가 성장했다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 이상했다. 첫 직장에서는 승진을 원하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모든 사람들에게 그게 당연하고, 서로의 이해관계나 내부 사정에 의해 승진 근처에도 가지 못했는데, 그때보다 열정이 사그라든 지금의 회사에서는 이토록 쉽게 승진을 하다니. 이직할 때 직급을 높여 왔으니 갑자기 이년만에 두 직급이나 뛰어오른 셈이다. 회사에서 프로모션이라는 게 단순히 열정과 업무능력, 성실함만으로는 되지 않고, 그 외 여러 가지 요소들, 이를 테면 상사와의 관계, 회사 상황, 타이밍 등에 의해서 크게 좌지우지된다는 건 알았지만 그 사실을 이토록 절실히 피부로 깨달은 것은 처음이었다. 불과 몇 년 전 첫 회사에서 승진자 명단을 보고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감상이었다. 이 놈의 프로모션이 뭔지. 여러 사람을 참 피곤하게 하는 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그래서 승진, 꼭 필요한가요?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직까진 같다. 아니요. 승진보다는 본인이 우선입니다.
여전히 승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여러 가지 이유로 승진이 절실할 것이고 나도 언젠가는 승진이 절실해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의 본질을 아는 것, 내 업무 능력을 키우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희로애락을 찾는 것, 즐겁게 회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내 정치가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지만 승진을 위한 사내 정치는 말리고 싶다. 얼마든지 분위기가 뒤바뀔 수 있는 게 사내 정치고, 나보다 오래 다닐 것 같은 사람이 어이없는 이유로 먼저 회사를 떠나거나 아예 반대로 움츠러들어 있다가 본인에게 잘 맞는 직무와 상사를 만나서 날개를 펴는 경우도 수 없이 보았다. 회사 생활에서 승진은 분명 중요하지만 개인마다 중요한 요소와 가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까, 승진이 멀어 보이거나 혹은 승진에서 누락됐거나, 아니면 아예 나처럼 의외의 승진을 했다고 하더라도 일희일비하지 말자. 회사 생활은 1-2년만 하고 마는 게임이 아니라 아주 길고 긴 마라톤 경주다. 첫 직장에서 내가 이렇게 빨리 매니저라는 직급을 달 거라고 전혀 상상도 못 했던 것처럼 그 기나긴 레이스에서 기회와 타이밍은 불쑥 찾아올 수 있다. 그러니, 스스로를 지켜나가며 꿋꿋이 생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