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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Bom Jan 20. 2019

내가 알던 너. 네가 알던 나. <완벽한 타인>

잠금 해제, 내가 인정해야 할 내 혐오스러운 모습

아주 늦게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관에서 내려간다는 소문이 다 퍼지고서야 아차, 싶어서 아직 하는 곳을 찾아서 급하게 보았다. 보고나서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세 가지 때문에.


1. 그리 잘 만들진 않았다.

아애 19세였다면 좋았을 텐데. 오늘은 막 나갈 거야! 해놓고 겨우 동네 술집에 가서 들킬까봐 쭈뼛대는 사춘기 청소년 같았다.


2. 커플에게 일탈이란 바람밖에 없나   

서로가 꽁꽁 감추려고 애쓰던 게 고작 바람이라니. 저렇게 매력적인 사람들말고 내 폰을 털어도 저거보단 다양하게 나오겠다 싶었다.

그래서 가장 볼 만했던 장면은 ‘게이’가 들통나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너무 코믹하게 그려졌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게이는 그 정도 무게인 걸까. 금방 무게가 가벼워져서 아쉬웠다.


3. 누구나 세 가지의 인생을 산다는 어설픈 결론   

이 영화는 친절하다. 영화가 끝나고 이야기의 결론을 문장으로 직접 보여준다. 조금 자간이 엉성했던 고딕체였다. 잘 어울리는 폰트인 지 모르겠다(직업병). 그래서 더 어설퍼 보였는지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세 가지의 인생에 격렬히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쉬움이 컸지만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였다. 이제부터는 나의 헛소리 리뷰.




산산이 부서진 내가 알던 너

폰을 잠금 해제하고 벨이 울리면 영화관의 모두가 긴장한다.

그렇게 <완벽한 타인>에서 내 아내와 친구는 믿어온 모습이 산산이 부서진다. 몸을 부대끼고, 모든 고통을 나눴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애초에 ‘모든’ 걸 가질 수 없는데, 가지지 못했다고 서로 화내는 꼴이다. 또 그런 나를 알아주지 못했다고 어린애처럼 울어대는 꼴이다.

멀리서 이들의 놀이를 지켜보는 제삼자로서 '참.. 서로에게 뭘 기대한 거야’, 라는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있지만, 시종일관 움찔움찔했다.

영화 시작 전, 진동모드로 바꿔놓은 내 스마트폰이 있는 오른쪽 주머니가 자꾸만 서늘해졌다. 아 나를 옥죄일 무언가가 여기에 있었지.



어제만 해도 나는 네 가지 인생을 살았다

영화가 끝나고 머릿속으로 내가 사는 여러 인생을 나열해 보았다. 또는 살았던.

혼자 있을 때, 회사에서, 엄마랑 전화할 때, 또 SNS에서. 외로움을 껴안을 때, 시시덕 거리는 사람일 때, 거룩한 모습과 행복한 모습.

사람이 과연 일관될 수 있을까? 소나무처럼 올곧은 사람은, 그래서 역사의 위인이 되는 게 아닐까.


여러 사람, 다양한 상황에서 살아남으려 하다 보니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줄 수 있게 노련해졌다.

누구나 무리나 사람마다 분위기를 파악해 그 자리에 어울릴 만한 대답을 내놓고, 행동을 취하면서 지낸다.

그 사람들은 내가 그곳을 벗어나자마자 하는 말들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건 하나이기도 하다. 결국 다 한 사람으로 귀결될 거다.


역시 염정아가 연기한 수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속옷을 갈아입거나 벗는 걸로 매일 스트레스를 풀었다. 아무도 모르지만 혼자만 아는 야릇함으로 욕구를 푸는 거다.  

누구가 걔 그러고 다닌데, 라는 썰을 전해 듣는다면 어우 망측하네, 라며 미간을 확 찌푸릴 만한 이야기다.

그치만 수현처럼 웃음거리가 될 행위를 사실 누구나 하고 있지 않나.

백만 가지 내 모습 중에, 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 하나 정도는 있지 않은가.


인간은 사회성을 가진 영장류다. 인간만큼 다양한 사회집단에 속하는 영장류가 없다고 한다. 난 내가 인간이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터질 것 같은 내 모습을 다양한 곳에서 조금씩만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스스로 안전해진다. 난 나를 사랑하는 법을 그렇게 배웠다.

나는 여러 모습일 수밖에 없고, 그 모습을 하나하나 표현해보면서.

결국 타인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저 비참하고 뒤틀려진 모습, 내게도 있는 걸, 하며.



내가 결국 타인이었다

나를 계속해서 타자화하면서 스스로 덜 혐오하게 되게 된 것 같다.

요즘엔 이런 생각으로 살다 보니, 사랑이 그렇게 위대해 보이더라.

예전엔 내 마음을 드러내는 걸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스러우니까,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그렇다고.

그치만 아니. 혐오스러운 모습을 껴안는 게 사랑이다. 날카로움이 곧 이빨을 드러낼 걸 알지만, 그럼에도 너의 등을 껴안을 수 있는 것이.


타인으로 시작해서 타인을 사랑하는 일까지 뻗어나가 버렸다.

누군가를 사랑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겁쟁이가 되어서는 마무리할 말을 마땅히 찾지 못했다.

내가 사랑하게 될 누군가가 영원히 타인일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 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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