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죽겠다고 선언했다

by 썸머G

엄마는 수액을 맞지 않겠다고 말했다. 곡기를 끊겠다고 말하면서 마치 ‘나 내일부터 탄산은 마시지 않을 테야’ 하는 톤이었다. 이미 주삿바늘을 뺐다고 했다. 주사를 꽂고 있는 한 죽지 않는다며. 어떻게 그러냐고 울먹이는 내게 엄마는 “뺀다고 바로 안 죽어. 걱정 마.”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퇴근하고 가겠다고 하니 기운 없으니 오지 말란다. 알겠다는 대답을 들어야만 전화를 끊을 엄마라 일단 그러겠다고 말했다. 퇴근을 하고 엄마에게 가면서 전화를 했다. 엄마는 기어이 나를 병원 문턱을 넘지 못하게 하고 집으로 돌아서게 했다.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길 한복판에 주저앉아 소리 내 울었다. 엄마가 진짜 죽으려나 보다. 엄마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나는 살면서 엄마처럼 자신에게 독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반드시 해냈다.


21년 10월 마지막 주, 코로나가 여전히 기승일 때, 엄마는 70 몇 차 항암을 하려 입원을 했다. 항암을 하기 전에는 피검사로 호중구 수치를 체크한다. 몸이 항암을 견뎌낼 수 있는 상태인지를 확인하고 항암 여부를 결정한다. 엄마는 피검사를 싫어했다. 약하디 약한 혈관을 찾느라 이리저리 주삿바늘을 찔러댈 때의 아픔도 아픔이지만 안 그래도 모자라는 피를 매번 많이도 뽑는다며 대체 어디에 갖다 쓰는지 모르겠다며 투덜댔다. 항암이 거듭될수록 항암을 못 하고 돌아가는 날도 늘어났다. 그런 날이면 엄마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나, 오늘 수치가 안 나와서 항암 못했어.”라고 말했지만 내심 좋아하는 기운은 전화기 너머로 묻어났다. 피검사를 했는데 수치가 못 미쳤다. 교수님이 몸 좀 추스르고 퇴원하자 할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길어질지 몰랐다. 먹는 대로 토하고 음식을 삼키지 못해 영양제로만 버틴 게 벌써 3주가 넘어가고 있다. 엄마의 손발은 코끼리처럼 무섭게 부어오르고 얼굴은 터질 것 같이 땡땡해지고 피부는 메마른 땅처럼 쩍쩍 갈라지고 텄다. 그런 엄마의 얼굴을, 손을 연신 쓰다듬는 내게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부으니까 얼굴이 통통해져서 살쪄 보이고 좋아. 얼굴 살이 빠져서 속상했었는데, 둥실둥실해 보이잖아.” 엄마는 자기 얼굴이 날카롭게 생겨 싫다 했었다. 순하게 생긴 내 얼굴이 그래서 좋다, 부럽다 했었다. “그래, 좋기도 하겠다.” 그랬던 게 바로 어제였다.


18년에 수술을 받은 후 엄마는 1주일에 한 번 내원하여 항암 주사를 30분 정도 맞았다. 엄마의 팔엔 멍 자국이 없어질 틈이 없었다. 그리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암은 재발했다. 이제부터 팔로는 감당할 수 없기에 오른쪽 쇄골 밑에 주사약이 들어갈 인공 혈관이라 부르는 케모포트를 심어야 한다고 했다. 암 수술 후 퇴원을 앞두고 우리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옥상에 올라가 바람을 쐬었다. 선 분홍 철쭉이 화단을 가득 메웠고 4월의 햇살은 기분 좋게 따끔했다. 엄마는 해의 기운을 받아야 한다며 바짓단과 소매를 둥둥 걷어붙이고 화단에 앉고는 사진을 찍어달라 했다. 엄마의 머리는 풍성했고 입고 있는 환자복은 마치 자기 것이 아니라는 듯 이를 훤히 드러내 보이며 선 분홍 철쭉만큼이나 발그스레 웃었다. 자신은 살 수 있을 거라는 그때의 믿음이 무모했다 느껴서였을까 케모포트 시술을 받던 날 엄마는 전에 없이 예민했다.


케모포트 시술 후 2주일에 한 번, 2박 3일 입원으로 길어진 독한 주사에도 암세포는 죽지 않고 다른 곳으로 퍼져나갔다. 다시 약을 바꿔 1주일에 한 번, 1박 2일 입원 주사가 들어갔다. 몇 차인지 세는 것도 의욕이 없어질 때쯤 엄마는 교수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했다. “언제쯤 끝날까요?” “끝이요? 끝이 어딨어요! 몸이 따라줘서 항암을 하면 사는 거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맞는 겁니다.”라고 교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했다. 그리고는 환자한테 희망은 주진 못할망정 어떻게 그렇게 매몰차게 죽는다고 말할 수 있냐며 나에게 울분을 토했다. 그 자리에 없었던 나로선 교수가 환자의 간절함보다 다소 덤덤하게 말했을 테고 어떻게든 자신의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줄 기운이 필요했던 엄마로서는 섭섭하게 들렸을 테라고 생각했지만, 엄마 편을 들며 같이 교수 욕을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지친 것일까? 그래서 엄마가 이제는 끝내겠다 마음먹은 것일까?


엄마는 죽겠다 했지만, 다음날 나는 엄마가 그렇게 원하는 출근을 했다. 출근길에 톡을 하고 점심을 먹고 전화를 했다. “영양제를 빼니까 배가 너무 고파. 그래서 교수님한테 다시 놔 달라고 했어. 자존심이 너무 상해. 죽는 게 쉽지 않아.” 엄마가 아프고 처음으로 엄마 앞에서 울었다. 엄마도 울었다. 그날도 엄마는 퇴근하고 병원에 들르겠다는 나를 주말에 보자며 오지 못하게 했다. 엄마의 목소리는 짱짱했다.


이틀이 지났다. 3일 밤만 더 자면 주말이고 엄마를 보러 간다. 벨이 울렸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그러나 낯설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병원이다. 엄마의 주치의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내가 환자의 보호자가 맞는지를 확인했다. 환자가 수면제와 진통제를 계속 놔 달라고 하는데 지금 환자의 상태가 약을 버텨내지 못할 것 같기에, 정확히는 얼마 전 교수님과의 상담에서 엄마는 연명의료 중단에 대해서 다시 한번 확실한 의사를 밝혔고,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환자가 고통스럽지 않게 수면제와 진통제를 투여하는 것뿐인데, 엄마는 진통제에 거부반응이 있어 진통제가 들어가면 구토를 한다, 그래서 수면제를 처방하려 하는데 현재 엄마의 장기 기능은 저하되어 있으며 폐에 물이 차기 시작해 호흡까지 힘든 상황이라 약을 주입하면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지금 의식이 있을 때 와서 얼굴을 보라는 거다.


엄마는 어제도 그제도 그리고 불과 3시간 전에도 나와 통화를 했었다. 심지어 배달 말고 제대로 된 음식으로 잘 챙겨 먹으라는 잔소리까지 했었다. 그랬던 엄마인데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인사를 하라니 터무니없다. 조퇴를 하고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주치의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1인실로 옮기는 게 좋겠다는 게 무슨 의미였는지도 모르는 채 급박한 상황치고는 너무 차분하게 말한 주치의의 목소리 톤을 상기했다. 별일 아닐 거라 나를 눌렀다.


나는 감당하기 힘든 일일수록 지나치다 싶은 정도로 차분하게 행동한다. 엄마가 암이라고 나에게 말했을 때도, 췌장 전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하고 진통제가 듣지 않아 밤새 소리를 지르며 고통스러워했을 때도, 수십 차례의 항암 치료에 빠지는 머리카락을 혼자 미용실에 가서 다 밀고 나타났을 때도 동요하지 않았다. 감정이 복받쳐 오르려 할수록 의식적으로 감정을 밀어낸다.


코로나로 병실 출입에 제재를 가하던 안전요원도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왔다 하니 올려보내 줬다. 엄마는 병실이 아닌 간호사 스테이션 옆 처치실에 있었다. 엄마의 모습은 처참했다. 소변줄과 일회용 기저귀를 차고, 침대에 짐짝처럼 구겨져 발버둥 치고 있었다. 호흡 마스크가 답답한지 연신 벗겨내려 하는 엄마를 저지하는 간호사가 엄마에게 내가 왔다는 것을 알렸다. 엄마는 나를 알아보았지만, 대화라는 건 할 수 없었고 엄마는 나에게 수면제를 놔달라고 힘없는 고함만 질렀다. 간호사는 내게 코로나로 면회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잠깐만 보고 가라 했다. 접혀 있는 엄마의 다리를 곧게 펴 뉘고 발에 치여있던 이불을 덮고 엄마의 이마를, 엄마의 민머리를, 엄마의 손을 쓰다듬으며 내가 여기 있다고 알려주었지만, 엄마는 그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몇 분 뒤 간호사에게 떠밀려 처치실에서 나왔다. 간호사는 환자 상황이 상황인 만큼 다인실에서는 있을 수 없을 것 같고 1인실에서 보호자와 함께 있는 게 좋겠다며 자신들이 1인실 자리를 신청해 놓고 알아볼 테니 나는 코로나 검사를 받은 후 음성 결과를 가지고 내일 오라 했다.


이게 깨어있는, 나를 알아보는 엄마를 보는 마지막일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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