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병실로 돌아가지 못하고 밤새 처치실에 있었다고 했다. 소리를 지르고 호흡기를 빼려 해서 계속 그러면 잠시 묶어두어야 할 것 같은데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했다. 병원으로 가고 있으니 절대 묶지 말라 했다. 병원에 갔지만 코로나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아 엄마를 볼 수 없었다. 수간호사가 1인실이 바로 나올 것 같지 않으니 검사 결과가 나오면 현재 있는 11병동에서 일반 병동 다인실로 옮기라 했다.
엄마는 11병동을 고집했다. 11병동은 병원 소속의 간병인이 상주하는 간호, 간병 통합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보호자가 없어도 되는 곳이자 보호자가 있으면 안 되는 곳이다. 상주 보호자와 함께 입원하려면 다른 병동으로 입원해야 한다. 엄마는 보호자를 원하지 않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고 긴 지루한 여정에 그 누구도 끌어들이지 않았다. 엄마는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뭐든 자기 손으로 해야 했고 손은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고 할 정도로 컸고 자기 손안에 있는 것은 퍼주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쌀독에 든 쌀을 몰래 가져다 배 곪는 이에게 가져다주고 동네에서 꼬질꼬질하다 싶은 아이들은 죄다 집에 데려와 씻겼다는 외할머니 썰은 나는 알 수 없는 시절의 엄마지만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픈 엄마가 기력이 딸려 더는 부엌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외숙모가 김치를 해왔다. 김칫값으로 엄마는 외숙모에게 돈 100만 원을 줬다. 그때 마침 홈쇼핑에서 김치 판매가 한창이었다. “엄마, 김치가 9kg에 6만 원이야. 대체 엄마는 시장 가격을 알기는 하는 거야?” 도대체 얼마나 비싼 김치를 우리가 먹는 거냐며 타박하는 내게 엄마는 김치가 얼마나 하기 힘든 줄 아냐며 오히려 나를 타박했다. 남한테는 받지 않을 수 있으면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게 제일 속 편하다 했고 조금이라도 받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에서 힘껏 돌려줘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엄마는 딸인 내 손조차 빌리지 않았다.
어제 주치의가 1인실로 옮기는 게 좋겠다고 말한 건 마지막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수간호사에게 1인실이 나올 때까지 옮기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막무가내로 1인실을 고집하는 내게 수간호사는 언제 나올지 모르는 1인실을 기다리느니 한시라도 빨리 엄마랑 같이 있는 게 낫지 않겠냐며 나를 회유했다. 아마도 어젯밤 보호자 없이 힘들었으리라, 더구나 통제가 안 되는 환자를 돌보는 건 더더욱 힘들었으리라, 그래서 보호자가 상주할 수 있는 일반 병동 다인실로 일단 보내고 보자 했을 것이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없는 다인실에서 엄마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엄마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었다. 엄마가 아프면 아프다고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맘껏 소리 지르게 하고 싶었다. 엄마 옆에 누워 엄마 숨소리를 듣고 싶었다. 엄마의 민머리를 원 없이 쓰다듬고 싶었다. 엄마의 뺨에, 엄마의 이마에, 엄마의 손에 뽀뽀하고 싶었다. 구차하다.
아빠는 2010년 담낭암 말기 진단을 받고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빠가 세상을 떠나기 전, 엄마는 아빠의 섬망을 보았다고 했다. 고함을 지르고, 욕을 하고, 주변을 시끄럽게 했던 생전에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빠의 낯선 모습, 그 기억은 엄마한테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하루라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나는 나 혼자 오롯이 엄마의 죽음을 마주해야 한다는 게 무서웠다. 엄마의 죽음 앞에서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올까 무서웠다. 제발 살게 해 달라도, 제발 편히 가게 해 달라도 못 하는 나를 볼까 무서웠다. 구차하다.
구차하고 구차하다. 나는 엄마 옆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엄마를 홀로 내버려 두었다. 밤새 나를 경멸하며 자책했다. 용서할 수 없다. 엄마는 나를 기다렸을까? 엄마는 무서웠을까? 그랬겠지. 그랬겠지. 내가 미쳤나 보다. 엄마, 내일 갈게. 날 밝으면 바로 갈게. 미안해. 엄마. 내가 정말 잘못했어. 좀만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