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면 죽는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절대 불변의 진리다. 사람들은 출생에 대해서는 자연스레 말하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는 것을 꺼린다. 나와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 대화 속의 죽음은 결코 무겁지 않았다. 엄마는 가려는 목숨줄 부여잡지 않고 길게 끌지 않고 꼴까닥 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외할머니가 사시는 동안 고통스러운 병 없이 사시다가 주무시듯 돌아가신 걸 부러워하며 엄마도 자는 잠에 스르르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죽는다는 소리가 웬 말이냐 꼭 나아서 나랑 같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야지 라는 말 대신 그런 죽음은 3대가 복을 쌓아도 힘든 은혜로운 죽음이라며 받아쳤다.
엄마의 잔소리는 끝내줬다. 허리는 꼿꼿이, 어깨는 활짝 펴고 걷고, 신발은 절대 끌면서 걷는 게 아니고, 밥은 천천히 꼭꼭 씹어먹고, 물은 차게 꿀떡꿀떡 마시지 말며, 미지근한 물로 자주 마시고, 비타민 C는 산이 강하니까 밥 먹고 나서가 아니라 밥을 먹는 도중에 챙겨 먹을 것이며, 제발 부탁이니 기름지고 튀기고 짜고 매운 몸에 해로운 음식은 먹지 말고, 밀가루 먹지 말고, 야채 위주로 생선 위주로 먹고, 과한 비누칠은 피부를 메마르게 하니 되도록 물 샤워를 하고, 과일은 식후보다는 식전에 먹을 것이며, 손톱과 발톱은 깔끔하고 짧게 그러나 너무 바짝 깎지는 말고,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자세는 허리에 좋지 않으니 등을 세우고 앉을 것이며, 운전은 나만 잘한다고 사고가 안 나는 게 아니므로 차 살 생각하지 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술은 혼자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술꾼 되는 건 시간문제니 그런 습관은 들이지 말 것이며, 안경 써도 이쁘니 눈이 피로한 렌즈는 되도록 끼지 말며, 잦은 염색과 펌은 머릿결을 상하게 하니 적당히 하라는 그런 잔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했다. 남자는 어떤 남자를 만나야 하며, 돈은 어떻게 불려야 하며,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조언은 없었다. 그런 건 마치 말해도 아무 소용없다는 듯,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네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듯. 내가 지키고 살 건, 이 시시하고도 사소한 것들이었다. 잔소리가 거의 빠짐없이 기억나는 걸 보니 엄마의 잔소리는 효과가 있었다고 봐도 되겠다.
잔소리에 덧붙여 내가 죽으면 혹은 내가 죽더라도 로 시작하는 날도 많았다. 그런 날이 연달아 있거나 길어지는 날이면 죽기는 할 수 있겠냐며, 대체 언제쯤 죽을 예정이냐며, 죽긴 죽더라도 나한테는 좀 알려주고 죽으라며 엄마에게 농을 건넸고 엄마는 그러게나 말이다 라며 크게 소리 내 웃었다. 한 번은 죽더라도 외가 말고는 아무한테도 죽음을 알리지 말라 했다. 죽으면 죽은 거지 그거 알아서 뭐 하냐, 와서 뭐 하냐. 번잡스러운 거 딱 질색이다. 알게 되면 알게 되는 대로 놔두면 된다. 굳이 알릴 사람 없다고 하길래 “엄마가 이순신이야?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하게.” 했더니 또 웃는다. 우리는 그렇게 웃으면서 자주 얘기했다. 엄마가 죽는다는 것을.
간호사는 울지도 않고 멀뚱히 서 있는 내게 정리를 하고 부를 테니 잠시만 나가 있으라 했다. 난 반사적으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돌아가셨어.” 잠깐 나를 보러 와서 아직 병원 1층에 있던 친구는 바로 올라왔고, 그 사이 기계장치를 떼고 엄마를 가지런히 눕힌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그제야 엄마와 나, 오로지 단둘이 남았다. 입 밖으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 엄마랑 나랑 둘만 있는 것처럼 우리를 힐끗거리며 지나가는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 옆에서 울다가 웃다가 떠들어댔던 나였다. 나는 엄마 머리를 그저 쓰다듬었다. ‘잘 가, 엄마 딸로 태어나서 나는 좋았어, 엄마가 내 엄마라서 나는 진짜 진짜 좋았어, 다음 생애도 엄마 딸로 태어날래, 사랑해, 가서 살아있을 때 못 잔 잠 실컷 자는 거다, 안 아플 거니까 나는 좋아, 나는 엄마가 걱정 안 하게 잘 살 거야.’라는 말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평온하게 누워있는 엄마의 민머리를 말없이 계속 쓰다듬었다. 엄마의 민머리를 난 자주 만지곤 했었다. 민머리에 뽀뽀도 자주 했다. 그리고는 “마미님 대갈빼기는 내 거.”라고 말했다. 우리는 나중에 엄마가 죽으면 묘비에다가 새기자며 까르르 웃곤 했었다.
엄마는 죽었다. 주저앉아 목놓아 울어봤자 엄마는 깨어나지 않는다. 작별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걸 애당초 할 수나 있단 말인가. 충분한 애도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 상황을 빨리 종료해야 한다. 바깥엔 이 상황이 정리되길 기다리는 간호사와 의사, 그리고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 친구랑 나랑은 누구의 부름을 받고 장례식을 치르러 온 업자처럼 한치의 버퍼링도 없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엄마 짐을 챙기고, 회사에 알리고, 상조회사에 전화를 해서 장례식장을 정하고, 장례에 필요한 사망진단서를 발급받고, 입원비를 정산하고, 엄마를 병원에서 장례식장까지 옮기고, 엄마의 시신을 장례식장 지하 냉동고에 안치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시간 남짓이었다. 기계처럼 움직였다. 감정 따위는 없었다. 장례식장 직원이 내 엄마임을 내게 확인하라 할 때도, 엄마를 그 차가운 지하에 혼자 내버려 두고 올라올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장례식장 상담실에는 장례 지도사가 도착해 있었다. 나는 여러 평수의 빈소 중 가장 작은 평수의 빈소를 고르고, 조문객의 식사 메뉴를 고르고, 유골함을 고르고, 영정 제단 장식을 고르고, 부고를 알릴 문자 메시지의 문구를 컨펌했다. 장례 지도사는 내게 기본적으로 포함된 지원 서비스와 물품을 설명하고, 장례 절차에 관해 설명을 했다. 빈소는 내일 낮 12시에 준비가 완료되어, 조문객은 3시부터 조문이 가능하고, 화장은 서울에는 일요일은 자리가 없고, 월요일이나 돼야 가능하다 했고, 일요일에 치르려면 서울이 아닌 곳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3일장이 아닌 4일장으로 치르고 월요일 새벽 5시 반에 출상을 하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친구는 내일이나 돼야 빈소가 준비되고, 상을 치르려면 에너지를 비축해야 하니 오늘은 마땅히 있을 데도 없는 병원에 있지 말고 집에 가서 쉬고 내일 나오자고 조심스레 말했다.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내일 다시 만나기로 했다.
집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가 내리자 친구도 내렸다. 그리고는 말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나를 안은 친구의 어깨를 오히려 내가 토닥거렸다. 친구를 보내고 현관문에 들어서자 그제야 나는 엄마를 그 차디찬 곳에 혼자 내버려 두고 왔음을 알아차렸다. 눈물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