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을 하러 대학 병원에 들어간 지 1주가 넘게 퇴원을 못 하고 있자 요양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침대를 오래 비워둘 수 없으니 재입원할 때 하더라도 일단 짐을 빼 달라했다. 야속했다. 한 달도 아니고 고작 열흘이 지났을 뿐인데 4년의 세간살이를 빼라니. 들어오려는 환자가 많은 것도 알겠고, 병원은 돈을 벌어서 누군가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사업체인 것도 알겠지만, 내 엄마만큼은 침대 하나에서 벌 수 있는 돈이 아니라 안전한 테두리에서 보살핌을 받는 환자로만 취급받기를 원했다. 보호자의 역할을 돈으로 병원에게 떠넘긴 내가 부릴 부아는 아니었지만 화가 났다.
병상 침대 하나, 일자형 상두대 하나가 들어선 4인실 귀퉁이 한쪽, 내 퀸사이즈 침대만한 공간에서 엄마는 4년을 살았다. 커튼 하나만이 엄마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줄 수 있는 그 공간이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숨 막혀 엄마에게 1인실로 가자 했었다. 엄마는 1인실이 독방같이 더 숨 막힌다며, 사람들하고 부대껴야 아프다는 것을 잊을 수 있고, 정보도 얻고, 고립되지 않는다 했다. 방에는 내 엄마 춘자 말고도, 목소리 크고 엄마를 유난히 따랐던 순자,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남의 얘기를 잘 들어줬던 영화와 오랜 투병 생활로 암에 대해서는 웬만한 의사보다 더 많이 안다고 교수라 불리는 임재가 있었다. 항암을 하고 돌아와 맥없이 쓰러져 있는 엄마를 일으켜 세워 밥을 먹이는 게 하는 것도 그들이었고, 밤에 앓고 있으면 간호사를 불러주는 것도 그들이었고, 면역력을 키우는 데는 이게 좋다더라, 항암 할 때는 이런 게 도움이 된다더라, 몸에 좋고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 알려주는 것도 그들이 했다. 물론 어떤 날은 감정이 상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서로 다르게 살아온 습관이 유난히 불편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그저 사람이 싫은 날도 있었다.
엄마는 집순이였고, 혼자서 잘 노는 사람이었다. 어디 나가서 밥이라도 먹자 하면, 어디 바람이라도 쐬고 오자 하면 자신이 한 밥이 제일 맛나고, 자기 집이 세상 어디보다 더 좋다 했다. 집 놔두고 어디를 가냐며 질색했다. 그런 집을 놔두고 병원살이가 지겨울 법도 한데, 사람이 징글징글할 법도 한데, 단 한 번도 집에 가고 싶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연명 치료는 받지 않겠다, 영양제를 빼 달라 교수한테 말한 날, 교수는 엄마에게 그러면 집에 가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낫지 않겠냐 했지만, 엄마는 병원에서 죽겠다 했다. 주말을 나와 함께 집에서 보내고 병원으로 돌아갈 때면, 엄마는 병원이 자기 집인 것처럼, 딸네 집에 놀러 온 사람처럼, “나, 이제 내 집으로 갈라요. 잘 놀다 가요.”라고 말하며 가방을 멨다. 그래서 나는 아픈 엄마를 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딸만 했다.
엄마의 가방을 풀고, 엄마의 물건을 거실에 펼쳤다. 난 버리기 선수다. 난 쓰지 않는 물건에 미련 따위는 없다. 애지중지하는 물건도 없다.
검은색 나일론 레스포색 백팩 - 엄마는 배낭을 좋아했다. 어디든 걸어 다닐 수 있으면 걷고, 택시는 타지 않으며, 버스와 지하철을 사랑하는 엄마는 배낭만큼 편하고 실용적인 가방이 없다 했다. 시장 어디에서 샀는지 짜가 프라다 로고가 박힌 검은색 나일론 배낭이 너덜너덜해지고서야 내가 사 온 이 가방을 뜯었다. 뜯고 보니 가방끈이 짝짝이였다. 산 지 한참 지난 거라 환불도, 교환도 못 하는 이 가방을 엄마는 시장에 갈 때도, 병원에 갈 때도, 집에 올 때도, 밖을 나설 때면 어디든 메고 다녔다. 엄마가 길이를 맞춰 야무지게 묶어놓은 매듭은 아직도 단단하다. 버릴 수 없다.
브론즈 크록스 이자벨라 젤리 슈즈 - 남한테 100만 원을 쓰는 것은 우스웠다. 김칫값이라고 외숙모에게 백만 원을 건넸고, 생일날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이모에게 백만 원을 건넸고, 변호사 개업을 한 조카사위에게 양복값으로 이백만 원을 건넸다. 자신한테 온 손님을 빈손으로 보낸 적이 없다. 그렇게 통 큰 엄마는 5만 원 남짓한 이 신발을 코스트코에 갈 때마다 쳐다보고 만져만 봤다. 여름 장마철에 신으면 딱 일 것 같다며 마음에 들어 했던 그 신발을 그해 여름을 지나 다음 해 여름이 돼서야 사서 신었다. 버릴 수 없다.
검은색 나르지오 워킹화 - 나는 이 신발이 싫었다. 색깔도, 모양도 투박하고 촌스러웠다. 엄마는 이름이 나르지오야, 날으지오, 날아다닐 만큼 세상에서 제일 편한 신발이라며 봄에 신으라고 사 준 핏플랍 핑크 우버니트 슬립온도, 겨울에 신으라고 사 준 라푸마 패딩 슬립온도 마다하고, 오로지 나르지오만 신고 다녔다. 대체 내가 사 준 신발은 왜 안 신냐며 툴툴거리는 날엔 몇 번 신어주고는 다음에 또 나르지오를 꺼내며 슬며시 물어본다. “딸~ 나, 나르지오 신고 싶은데, 이거 신고 나가도 돼?” 버릴 수 없다.
다이소에서 산 겨자색 지퍼 동전 지갑 안에 신분증, 대학 병원 환자 등록증,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증, 신용카드 한 장이 들어 있다. 화장품은 스킨과 로션이 전부다. 것도 온통 샘플뿐이다. 엄마의 옷가지와 소지품은 100리터 비닐봉지 3장으로 끝났다. 죽고 나면 자신은 할 수 없는 자신의 뒤처리를 누군가가 해야 한다는 것이 미안했던 엄마는 살아생전에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늘 집에 있었다. 외출할 때면 식탁 위에 메모가 올려져 있었다. 메모에는 냉장고에서 우리가 무엇을 꺼내어 먹으면 되는지, 어떻게 먹으면 되는지에 대해 적혀 있었다. 엄마의 수첩은 챙겨야 할 집안의 대소사부터 엄마가 기억해 두어야겠다 하는 모든 일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엄마가 아팠을 때 엄마의 달력에는 엄마만이 알 수 있는 메모가 있었다. 화장실을 몇 번 갔는지, 오늘 몸컨디션은 어땠는지, 밥은 어떻게 먹었는지,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달력 한 칸은 그 많은 내용을 담기엔 너무 작아 엄마만의 암호로 적혀 있었다. 엄마는 파워 J다. 계획적이고 그리고 자신이 해야겠다 마음먹은 건 반드시 지켰다. 암 진단을 받고 나서부터 죽음을 준비했다. 최선을 다해 치료에 임하면서도 내일 곧 죽을 사람처럼. 엄마는 엄마가 죽으면 버릴 옷과 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옷까지 정하고, 요양 병원 개인 냉장고에 있는 반찬 중에 버릴 것과 내가 가지고 가서 먹었으면 하는 반찬까지 말하곤 했었다.
엄마가 죽었다. 단 한 장의 메모도 없이. 외출할 때도 식탁 위에 메모를 꼭 남겨두고 집을 비웠던 엄마인데 영영 볼 수 없는, 만질 수 없는, 만날 수 없는 먼 길을 떠나면서. 그렇게나 길게 죽음을 준비했으면서. 엄마의 유품, 어디에도 그 흔한 메모 한 장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엄마는 그렇게 미련 없이 떠났다. 나에게도 그렇게 살라 하는 것처럼. 엄마 생각하지 말고, 미련 두지 말고 잘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