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드라마 광인 저는 웬만한 로맨스 드라마는 모조리 섭렵했습니다. 그런 제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엔딩이 있습니다. 사실 로맨스는 아니고 시트콤인데, 시청률도 화제성도 높았던 ‘지붕 뚫고 하이킥’입니다. 125회 동안 시종일관 코믹하고 유쾌했던 드라마는 마지막 회 충격적 새드엔딩으로 대한민국 시트콤 일대에 파란을 불러일으켰답니다. PD가 대국민 사과까지 했으니 말 다했죠.
가난한 가정부인 세경은 주인집 아들 의사 지훈을 짝사랑했지만, 신분의 차이를 넘지 못할 사랑을 포기하고 이민하기로 결심합니다. 공항으로 바래다주는 길. 쏟아지는 비를 뚫고 달리는 차 안에서 세경은 한 번도 꺼내보지 못했던 진심을 쏟아냅니다. 당신을 많이 좋아했다고. 너무 많이.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설레었다고.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걸레질을 해도 좋았다고. 그러다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부끄럽고 비참했다고. 지훈은 검정고시를 권하며 신분의 사다리를 오르도록 노력하라 했던 충고가 세경에게 상처가 되었음을 자각합니다. 사과하는 지훈에게 세경은 말합니다.
“괜찮아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의 끝이 꼭 그 사람과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다 와 가나요? 아쉽네요.......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결말이 예상되시나요? 네, 정말 시간이 멈췄습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유명을 달리했음을 암시했고 엔딩송이 흘렀죠. 이 장면을 제가 좋아하는 이유는 100% 세경에게 감정이입을 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에서는 통상 신분이 다른 사람과의 사랑도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세경과 같이 지레짐작하여 포기하는 경우가 다반사죠. 그렇다 해서 사랑의 크기가 작은 건 아닙니다. 세경의 절절한 고백처럼 못 이룬 사랑은 더 애틋한 법이죠. 그런데, 세상에! 그녀가 작게 읊조리며 말한 소원을 PD가 들어줍니다. 실제 시간을 멈춤으로 말이죠. 저는 이렇게라도 세경의 손을 번쩍 들어 승리를 선언해 준 결말이 꽤 통쾌했습니다.
“네가 내 침대로 올 때마다.. 그러고 나서 잠이 들면 난 더 이상 잠을 깨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해...... 난 잠을 깨고 싶지 않아. 이건 머릿속에서만 생각했다가 지나가는 그런 것이 아니야. 정말 내 유일한 소원은 죽는 거야.”
성전환하여 여자가 된 몰리나는 미성년자와 관계한 죄로 감옥에 수감되고 정치범 발렌틴을 만납니다. 발렌틴은 이성애자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평생 사랑했던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리나는 발렌틴을 사랑하게 됩니다. 발렌틴은 지식인이요 행동가입니다. 자신이 품은 이데올로기와 대의를 잃는 것을 그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꽤 멋진 남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처지는 곤궁에 처해 있습니다. 정부는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반군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교도소에 갇힌 발렌틴을 독촉합니다. 모진 고문을 당해도 열리지 않는 그의 입을 열기 위해 몰리나를 이용하지만, 몰리나는 오히려 교도소를 이용해 발렌틴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줍니다. 교도소의 괴롭힘으로 밑바닥까지 내려가 추한 꼴을 보이는 발렌틴의 배변을 치워주고, 피폐해진 그를 먹이고, 씻기며 그 사랑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집니다.
결국 발렌틴과 사랑을 나누게 된 몰리나는 침대에 누워 고백하는 겁니다. ‘내 유일한 소원은 죽는 거야.’라고
이번 결말 또한 예상되시나요? 네 그렇습니다. 죽습니다. 비참하게도 몰리나를 죽인 건 반군 즉 발렌틴의 진영이었습니다. 발렌틴은 모진 고문을 당하다 진통제를 맞고 꿈을 꿉니다. 꿈에서 오랫동안 사랑했던 여인과 대화합니다. 꿈속에서 그는 몰리나의 죽음은 결국 자신 때문이라며 괴로워하지만, 대의명분에 의한 죽음이었기에 행복하길 바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몰리나에게 대의명분이 있겠습니까? 곧 그의 여인, 즉 상상 속 환영은 그것을 부정합니다. 몰리나의 죽음은 대의명분과는 상관없다고. 영화 속 여주인공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 죽음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두 작품 모두 ‘시간이 멈춰도 좋을 만큼’의 사랑에 대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어도 좋을 사랑.... 혹시 그런 사랑을 하고 계신 분. 아니했었거나, 해볼 뻔했거나 하신 분 있으신가요? 사실 저는 모릅니다. 그런 사랑은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사랑의 대표주자 카레닌도 못 하는 것 아닌가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참고)
그러니 제가 저의 남은 생을 있는 힘껏 충실히 살아낸다 해도. (사랑을 이성 간의 것으로 한정시킬 때) 사랑의 질량에 있어서만큼은 못 배우고 가난한 가정부와 변태 취급당하는 성전환자에 못 미치는 겁니다. 그들의 사랑은 PD와 작가라는 창작자를 통해 신분과 인종과 천부를 뛰어넘어 성취되었습니다.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는 성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혁명 등 다소 무거운 주제로 깊이 조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오랫동안 뮤지컬로, 영화로 변주되며 계속 전해지는 이유는 이 드라마 속에 담긴 ‘사랑’의 힘일 겁니다.
무언가를 뛰어넘는 사랑에 우리는 열광합니다. 정작 우리들의 삶은 무언가를 뛰어넘기는커녕 삼시 세 끼에 묶여 있기 때문에 더 그럴 것입니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고 박완서 선생께서 말하였듯. 못 이룬 사랑이 더 애틋한 법입니다. 지금 사랑이 애틋하지 않다면 이미 이루어져 버렸기 때문이죠. 남편과 저의 사랑이 그렇듯 말이죠.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