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서평쓰기 3
앤서니 버지스/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05년
“저들은 너를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었어.
네겐 선택할 권리가 더 이상 없는 거지.
넌 사회에서 용납되는 행동만 하게 되었어.
착한 일만 할 수 있는 작은 기계지."
발표 당시 논란이 굉장했을 거다. 폭력에 대한 역치가 높아진 21세기에 읽어도 불편한데, 1962년도엔 오죽했으랴. 열다섯 알렉스 일당이 자행하는 살인, 강간, 폭력의 묘사가 생생하여 불편을 넘어 불쾌감을 일으킨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도 성에 안 찬다. 짐승이 짐승을 해치는 것은 배고픔이나 두려움 때문이다. 알렉스에게 폭력은 감각적 쾌락과 자신의 전능함을 확인하려는 수음(手淫) 행위에 불과하다.
이 잔학무도한 청소년은 클래식 애호가다. 클래식이란 교양인이 누리는 취미라는 통념이 전복된다. 알렉스는 위대한 음악이 비행 청소년을 문명화의 길로 인도한다는 신문 사설을 읽으며 ‘개뿔이 나’라며 비웃는다. 이어지는 말이 가관이다. ‘음악은 마치 날 하날님이라도 된 듯 느끼게 해서 인간들을 나의 전능한 힘 아래 벌벌 기게 만들 준비를 시키지’ 그는 베토벤의 「합창」 모차르트의 「주피터」,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들으며 전율을 느낀다. 비극이다. 클래식을 통해 얻는 전율이 마약이나 폭력을 행할 때와 같은 종류라니.
그에게 당한 피해자는 모두 무고한 시민인데, 대부분 노약자다. 평화로운 어느 날 짐승 같은 놈들의 무자비한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멧돼지나 곰에게 습격당했다면, 해결책은 쉬워진다. 총살하면 그만. 짐승만도 못한 놈의 목숨이 아깝겠는가. 응보의 원칙. 임마누엘 칸트도 보복만이 형벌의 질과 양을 명확히 제시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범죄 없는 세상을 만드는 루도비코
그러나 버지스는 다른 차원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국가가 범죄자의 뇌에 약물을 주입하고, 그 효과로 악한 의지를 제거하고 선한 의지만 심어 줄 수 있다면? (극 중 명칭은 조건반사 기법을 활용한 ‘루도비코’ 요법) 총살보다 효율적인 ‘Everyone is happy’ 한 방법 아닐까? (알렉스 말투로)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루도비코 요법에 찬성하기 위해선 이 물음에 답을 내려야한다.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국가의 평온’과 같은 공동체적 가치를 ‘개인의 자유’에 우선해도 되는가? 이 명제가 참이라면,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는 억압될 수 있다.
작가가 던진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소설 내용을 파악해보자. 친구들의 배신으로 교도소에 수감된 알렉스. 수감자들과 함께 살인을 저지르고, 그 죄를 혼자 뒤집어쓴다. 그 바람에 알렉스는 몸에서 범죄의 생리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프로젝트의 첫 번째 피 실험자가 된다. 바로 루도비코 요법. 뇌에 고통의 알고리즘을 심기 위해 잔인한 폭력 영상을 계속 보여준다. 알렉스는 약물 반응으로 메스꺼움에 몸부림치며 영상을 보지 않으려하지만, 손발은 물론 두 눈꺼풀까지 집게로 고정되었다. 선택할 권리를 박탈당한 벌거벗겨진 눈알이 움직이는 모습이라니! 루도비코 요법은 목적과는 어울리지 않게 가학적이고 폭력적이다. 알렉스 앞에 더 큰 문제가 닥쳤다. 과학자들은 약물의 효과를 극대화하기위해 클래식을 이용했다. 치료가 끝날 무렵, 알렉스는 클래식 음악을 듣기만 해도 극도의 메스꺼움을 느꼈다.
시계태엽 알렉스의 비극
출소를 하루 앞둔 알렉스는 정부 관료를 관중으로 무대에 서 있다. 루도비코가 얼마나 효과적인지 보여주는 공연을 하는 꼴이다. 폭력적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릎을 꿇고 혓바닥으로 신발을 핥으며 비는 알렉스. 피해자에게 그는 이보다 잔악무도했으니 당해도 싸다. 내가 짐승이냐고 항변할 때 네겐 선택권이 없다며 냉소하는 모습에도 오히려 속이 후련하다.
그러나 출소 후 상황은 우리를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한다. 알렉스는 자신이 폭행했던 피해자에게 뭇매를 맞고 도망치다 과거 윤간을 저지른 집을 찾아가게 된다. 범죄 당시 복면을 썼던 터라 살아남은 피해자 중 한 명인 집주인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보살펴 준다. 집주인은 진보정당에 소속된 정치인이자 작가다. (얄궂게 알렉스와 이름이 같다. 책에서는 알렉산더라 구분한다.)
합목적성이 상실된 이념은 붕괴된다.
알렉스로부터 루도비코의 전말을 듣게 된 알렉산더는 분개한다. ‘어떤 정부라도 버젓한 젊은이를 태엽 감는 기계’ 만들면 안 된다며 도움을 자청한다. 그러나 곧 그가 과거 자기 부인을 윤간하여 자살에 이르게 한 가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알렉산더와 그의 동료 정치인들은 알렉스를 돕겠다던 계획을 바꿨다. 그를 감금하고, 살려달라는 외침과 절규를 무시한다. 극도의 고통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그를 방치한다. 그들이 사용한 방식은 놀랍게도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는 것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토록 반대하는 루도비코 요법을 활용하다니! 그들이 지켜야 할 위대한 자유의 전통! 그들의 ‘대의’는 ‘개인의 원한’과 ‘집단의 목적’에 의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만약, 이 소설의 배경이 독일이고 루도비코 요법의 합법화에 대한 헌법재판이 열린다고 생각해보자.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부결. 이유는?
- 독일 기본법 1조 1항 -
‘인간 존엄은 감히 건드릴 수 없다. 이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의무이다.’
독일기본법에서 보여주는 인간 존엄의 특별한 위상이 나치 시대의 반성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루도비코 영상에 유태인학살 장면이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간 존엄의 지위를 다른 것에 양보했을 때,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상기하기 위함일 것이다. 작가는 루도비코를 가운데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 진영의 논리적 결함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며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의 의미에 대해 깊이 있는 물음을 던진다.
좋은 책을 읽을 때는 그 속에 들어가 한바탕 맹렬히 뒤섞여진다고 했다. 독서모임에서 『시계태엽 오렌지』를 함께 읽으며 인간의 자유의지와 존엄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토론했다. 고전이 던지는 물음에 한바탕 뒤섞여 보았다. 전자팔찌, 화학적 거세 등 오늘날 우리의 삶과도 맞닿은 주제이기에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더불어 탁월한 묘사와 속도감과 넘치는 문장까지 지루할 틈 없이 매력적인 앤서니 버지스의 세계에 한바탕 뒤섞여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