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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May 08. 2024

당신을 데려가 달라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나의 부모님|당신을 만나는 날

새벽..

허리, 골반, 종아리, 온몸이 다 아파서 잠을 설친다.

노산인 나에게 육아는 그야말로 삭신이 쑤시는 고통의 연속이다. 힘이 든다.


옆에서 쌔근쌔근 소리가 들린다.

온 이불을 발로 차며 자는 아기 옆에서 잠을 못 이루고 1시, 3시, 5시..


잠이 오지 않아, 옆에 누운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 사랑스러운 아기는 왜 다리 위에 이불이 덮이는 것을 싫어할까?'로 생각을 시작했다.


봄 내복만 입혀두고 H자 모양의 임산부용 바디필로우로 아기를 감싸 놓았는데 (H에 저 '-'부분이 얇은 천으로 되어 있어 아기의 가슴을 덮어주기 좋다.) 이불을 자꾸 걷어차니 감기에 걸릴까 걱정이 되는 늙은(?) 초보 엄마는 연신 이불을 끌어올린다.

그럴 때마다 나의 아들은 자면서도 다리를 들어 올려 걷어차기 바쁘다.

쪽쪽이가 입에서 떨어질 때마다 울어제치 거나, 혼자 깜짝 놀라 엄마를 더듬는, 그래서 새벽에 한두 번씩은 꼭 깨는 예민한 아가 옆에서, 이불을 걷어차며 '만세'한 채로 자는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하염없이 바라보다, 생각이 났다.


나의 아빠가..


아빠는 내가 중 1 때부터 아프셨다.

어느 날 시력 2.0을 자랑하던 눈이 잘 보이지 않았고, 교회를 다녔지만 침을 잘 놓으시는 분이 계시다 해서 절에 가는 전철역에 멈춰 섰다. 그러다 어지러움에 쓰러지셨고, 뇌수막종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처음 수술했을 때는 당시 아빠가 술, 담배를 하셨을 때라 수술 후 얼굴이 퉁퉁 부어 계셨다 했다. 중환자실에 있는 아빠  모습을 보고 중1인 딸과 초5아들이 충격을 받을까 엄마는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에는 면회를 시켜주지 않았다.


그 후로 생계를 책임지느라 나의 엄마는 밤늦게, 때론 새벽까지 일을 하고 들어오셨고 환갑이 지나서야 칠순이 넘은 아빠와 이별을 했다.


지금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얘기지만, 어린 동생과 나는 밤이 되면 아무도 없는 엄마, 아빠 방에 들어와 둘이서 손을 잡고 아빠를 빨리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우리 네 식구가 예전처럼 잘 살게 해달라고 동생과 나는 그 어릴 적 이불을 적시며 울었다.


그렇지만 아빠는 그 후로도 몇 번 재발을 해 수술을 했고,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결국 집에 계셔야 했다. 사업을 하셨는데 그만두게 되었고, 부모님이 검소하신 덕에 꽤 좋은 아파트에 살았던 우리는 길 건너 작은 아파트, 또 길 건너 상가주택, 또 멀리 떨어진 반지하에 살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감사한 건 단 한 번도 내가 그런 환경에 놓여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몰랐다는 거다. 그저 사랑받으며 걱정 없이 유복하게 자란 학생, 청년으로만 알도록, 부모님은 나를 헌신적으로, 애써 키우셨다.


아픈 와중에도 늘 자식들을 끔찍이도 아꼈던 아빠는 엄마가 일 하러 나간 동안 미역국, 김치찌개, 꽁치찌개, 김밥 등을 싸서 우릴 챙겼고 밥을 짓고 보리차를 매일 끓여놓으셨다. 고생하는 엄마를 위해 뭐라도 하시려고 아픈 몸으로 집안일을 하셨고,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까 싶어 몸이 어느 정도 니야지 셨을 때는 고깃집도 하시고 수출업도 하셨다.

그러나 IMF가 터지고 가게도, 사업도 그만두게 되었다.

아빠는 어쩔 수 없이 무능해졌고, 건강도 더 나빠졌다.

술, 담배를 끊었었는데 가족 몰래 술을 드시기도 했고 딸인 내가 너무도 싫어하고 대드니 몰래 옷장에, 찬장에 소주병을 숨겨두시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귀신같이 그 술병들을  찾아 아빠 보란 듯이 싱크대에 소주를 콸콸 쏟아버리거나, 물을 채워 있던 자리에 몰래 다시 넣어놓거나 했다. 어떤 때는 큰 소리를 치며 아빠를  향해 분노했다. 아빠를 비난(?)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이 아빠의 첫 정인  딸, 바로 나였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온 가족이 고생을 하는데 술을 먹지?'

'얼굴을 붉히며 도리어 짜증을 내지?'


아빠한테 버럭버럭 대들다가 혼나기도 하고, 방 문을 쾅 닫아버리고 문을 잠고 분노와 원망을 쏟아내다 울며 잠들던 나는 아빠와 치열하게 다퉜다.

그리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란히 둘이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귤을 까먹고 하하 호호했다.


돌이켜보면 아빠가 처음 아파 수술을 했을 때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쯤, 40대 초반이었으니, 아빠는 얼마나 건강하게 즐겁게 살고 싶으셨을까? 싶다..

그런 40대의 아빠가 지금 생각하면 너무... 너무.. 가엽다.


사실 아빠가 아팠던 것, 이로 인해 우리 가족이  힘든 시기를 겪게 된 것 모두, 아빠의 책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아빠가 서울대병원에서 머리(뇌) 수술을 하고 입원실에 있는 중에 수술 부위의 꿰맨 부분이 터졌던 일이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무섭고 아프다.

아빠를 보러 간 딸이 병실 앞에 서있는 걸 보고 아빠는 침대에 커튼을 친 채로 마취도 못하고 터진 부위를 꿰매야 했다.

커튼 밖에 있는 딸이 놀랠까 봐 아프다는 소리도 못 내고 이를 악물고 버티셨나 보다. 다시 커튼이 쳐졌을 때, 나를 바라보는 아빠의 큰 눈은 눈물이 맺힌 채, 충혈되어 있었다.


그렇게 아빠는 30년을 넘게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다. 마지막으로 종양이 전이되고 있을 때는, 제거하는 경우 두 눈이 보이지 않게 될 거란 얘길 들었다. 아빠는 이미 한쪽 눈의 시신경이 죽은 상태라 다른 한쪽 눈으로 아주 희미하게 형태만 보실 수 있었는데, 엄마는 그 눈마저 멀게 되면 하루 종일 누워만 있는 아빠가 너무 답답하고 힘들거라 생각해, 수술을 포기하셨다.

(수술을 포기한다는 상황이 내겐 나을 기회는 박탈하는 것처럼 느껴져 엄마가 야속했던 순간이 있었는데, 엄마는 하루종일 누워있는 아빠가 두 눈 마저 잃게 되는 것은 너무 가엽다고 울먹이셨다.)


다행히 아빠는 종양이 전이되는 과정에도 크게 고통스러워 하시진 않았다. (적어도 드라마에서 보는 말기 암환자의 고통스러운 모습 같진 않았다.)

물론 돌아가시기 전까지 섬망 증상, 치매 증상도 있었고 이따금씩(나중엔 줄곧) 왠지 모를 이유로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앓기도 했다. 이상한 소리로 옆짚에 다 들리도록 '아! 아!' 하셨던 소리가 아빠의 아픔과 고통이었다면 아빠는 얼마나 힘드셨던 것일까?


환자가 제일 고통스럽겠지만 환자가 있는 집안의 분위기는 어둡다. 

'긴 병에 장사 없다'라고 우리 가족의 삶도 너무 힘들었다.

동생에게 공황이 왔고 우아하고 편안했던 엄마의 모습엔 생활력으로 중무장한 억척스러움이 보였다.

나는 이 점이 제일 가슴 아프고 슬펐다.

나 역시 어느새 활발함은 사라지고 소심하고 냉소적인 생각이 많은 사람으로 변해갔다.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아픈 환자를 간병하느라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온 가족이 피폐해졌다.


'아프면 아이가 된다고 했던가?'아빠의 투정과 짜증, 고집을 받아주는 것도 세월이 길어질수록 쉽지 않았다.

가끔 몰래 술이라도 드시고 얼굴이 붉어져 있는 모습을 보면 아빠의 병과 행동이 엄마를 저리도 힘들게 하는구나 싶어 나는 점점 아빠를 미워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의 힘듦과 우울함이 아빠에게서 비롯되었다 생각하니 점점 아빠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아빠  역시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았을 거고, 힘들었을 것이다. 어린 자식들이 맘에 쓰이고 가장이 된 젊은  아내의 고생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나는 커가면서 그 마음을 알게 되었지만, 너무 힘들어 아빠의 마음을 외면했고, 원망했고, 울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교사가 된 후, 두 번째 학교에서 근무할 때다. 20대 후반의 나는 열악한 지역의 학교로 발령받아 근무를 했는데, 교실에 가기 두려울 정도로 막강했던 아이들이 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폭탄 머리를 하고 치마는 거의 안 입은 거 같이 입고 앉은 여학생들이 반에 서너 명씩 있었다. 화장실 옆 복도는 뿌옇고, 큰 덩치의 남자애들이 우르르 학교 안팎으로 돌아다녔다. 분홍색 커튼이 쳐있던 교실에는 여학생들이 책상을 붙여 팔을 베개 삼아 누워있곤 했다. 남학생들은 침을 아무 곳에나 뱉고 수업을 할 때면 게슴츠레 한 눈빛으로 나를 보기도 했다. 

나의 기억이 과장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학교 생활이 녹록지 않았다.


점점 수업 들어가는 게 부담스럽고 숨 막힐 무렵, 아빠가 더 편찮아지셨다. 엄마는 더 고생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 시절,  나는 너무 힘들어 수요일과 금요일이 되면 퇴근 후 교회에 갔다. 혼자 예배가 끝나면  울면서 기도했다.

'아이들을 변화시켜 달라고.. 가르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교실에 들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게 해 달라고...'

그리고 '아빠를 하나님 곁으로 데려가 달라고..'

때로는 불이 꺼진 교회 바닥에 앉아 가슴을 치여 울기도 했다...


몇 년 뒤  목사님이 그러셨다. 부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를 잘 몰랐을 때, "저 청년은 무슨 일로 매일 울면서 저렇게 기도를 하나..' 했다고.

그때는 그 말에 웃을 수 있었지만, 매일 울며 기도하던 그 시절의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아빠를 이후로도 우리 가족 곁에 십 수년 더 함께 할 수 있도록 삶을 허락하셨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아빠는 담낭에 문제가 생겨 시술 후 관을 삽입한 채로 있었어야 했는데 중간중간 의식이 온전하지 않았기에 누군가가 계속 지켜봐야 했고, 어쩔 수 없이 요양병원에 보내게 되었었다.

그 당시에 나는 결혼해서 독립해 살 때인데, 아빠가 계실 요양병원이나 국공립 시설, 요양원을 알아보느라 퇴근 후가 더 분주했다.


이곳저곳을 다니면서도 아빠를 가족들이 힘들어서 '버리는 것'만 같아 연신 울며 다녔다. '죄책감 같은 것을 덜어내고 싶어서였을까?' 빚을 내서라도 좋은데 모시겠다고 최고급 시설의 요양 병원을 알아보는 나에게 '그런 곳에서는 아빠 같은 환자는 받아주지도 않는다.'라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요양 병원에 입원한 다음 날, 퇴근 후 빵을 사가지고 병원에 갔는데 조선족 간병인이 밥을 먹으라고 핀잔을 주자(나는 그분의 말투와 행동이 거슬렸는데), 아빠가 밥을 그의 얼굴에 내뱉어버렸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구나.'하고 짐작했다.

아빠는 당시 의식이 어느 정도 있었던 환자였는데 몸이 불편하고 밤에 이상한 소리를 질러대니 밤새 학대를 했던 거다.

골절 환자들이 있던 병실에서 밤 사이 아빠를 의식이 없는 어르신들이 있는 병실로 옮겨버렸다. 아빠는 밤사이 얼굴빛이 검게 변해있었다.

신랑은 그 길로 병원에 강력하게 항의를 했고, 우리 가족은 아빠를 집으로 다시 모셨다.

안방에 환자용 침대를 들여놓았고, 아빠의 의식이 온전치 못할 때 혹여 담낭에 삽입한 관을 뽑을까 봐 엄마는 일하러 갈 때마다 (요양보호사가 오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아빠의 두 팔을 묶어 두어야 했다.


방학 때는 일하러 간 엄마 대신 내가 친정으로 가 아빠를 돌보았는데 ,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는 정신도 온전치 않으시고 아기같이 되어 버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면 들리는 소리,  "순애야~"

아빠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의식이 왔다 갔다 하는 중에, 혹여  침대에서 떨어질까 묶어놓은 줄에 의지해 엄마 이름을 하루 종일 부르고 계셨다. 혼자서 가족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빠는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시집간 딸이 사위와 찾아왔다 돌아갈 때면 반갑고 아쉬워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도 아이처럼 우시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엄마는 딸만 오면 운다고 놀렸는데, 그럴 때마다 아빠의 큰 눈에서는 어김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빠는 찬송가를 틀어주면 유독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노랫말에 의식이 없는 중에도 눈물을 흘리셨다..

아빠도 많이 힘드셨나 보다..


그 꼿꼿함으로 버티던 분이 딸이 대소변을 처리해 줘도 부끄러움을 못 느끼실 무렵, 아빠는 종양이 아닌 폐렴으로 돌아가셨다.


학교에서 연락을 받고 병원에 갔을 때는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동생과 엄마가 창백한 모습의 아빠 곁에 서 있었다.


돌아가신 아빠의 귀에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그렇게 아빠와 나는 이별했다.


사실 엄마와, 주변 사람들은 아빠가 나의 결혼식을 못 볼 거라 했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신부입장 때 아빠는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몸을 떨며 지팡이에 의지한 채로 나의 손을 잡고 들어가셨다.


가족들, 친구들, 어느 정도 상황을 아는 학교 선생님들은 그런 우리 부녀의 모습에 눈물을 닦으셨다... 나는 일부러 더 활짝 웃으며 눈물을 참고 신부 입장을 했었다.

그때도 아빠는 많이 아프셨을 때인데 지금 결혼식 사진을 보면 돌아가시기 직전의 아빠 모습과는 달리 참 젊고 건강해 보인다..

시간이 가면서 더 많이 연약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돌아가신 아빠의 얼굴은 참 곱고, 환했다.

두 손이 어린아이 살결처럼 너무 보드라웠다.

나는 곱고 고생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환한 아빠의 얼굴과 손, 발이 감사했다.

비록 30년을 넘게 병상에 누워 가족의 짐(?)이 되었던 때도 있었지만, 아빠가 엄마의 남편이어서, 그래도 착한 남동생의 아빠여서 이렇게 편한 모습으로 돌아가실 수 있었던 것 같아 다행이었다. 요양병원에서의 단 하루를 제외하고 아빠를 혼자 두지 않았던 엄마가 위대했고, 미안했고, 감사했다.


비록 손자를 보시진 못했지만-

아이를 너무 좋아하는 정 많은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우리 아기를 아끼고 사랑해 주셨을까 생각했다.


'사무치게 그립다'는 말을-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다'는 말을-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문득문득, 마흔이 넘은 딸은 아빠가 사무치도록 그립고 보고 싶다.

꿈에서 만난 아빠가 보고 싶어 자다가 엉엉 울기도 한다.


새벽, 너무 사랑스럽게 자던 나의 아기, 나의 아들을 보면서 8년 전 돌아가신 아빠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한 때, 제발 '아빠를 데려가 달라고', '엄마를, 가족을 고생시키는 아빠를, 그만 좀 데려가 달라고' 소리 내 울며 기도했던 나를 아빠는 용서하셨을까..?


훗날 천국에서 만날 아빠에게 꼭  전하고 싶다.

'사무치게 그립고, 보고 싶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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