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이 지나간 관계에 대하여

by 송지영

해가 바뀌는 시기에는 새로운 마음들이 앞자리를 차지한다. 오가는 인사말은 잦아지고, 달력의 여백은 빠르게 채워진다. 그 와중에, 예전 같았으면 관성처럼 나왔을 “새해에 한번 보자”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사이가 있었다. 마지막까지 덧붙이지 못한 인사 하나가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

상실을 지나오며,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말과 반응이 본래 이렇게 복잡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 중심에는 결핍이 있다. 그것은 갖지 못한 무엇이 아니라,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쉽게 건너지지 않는 자리이다. 그래서 어떤 말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와닿고, 어떤 대화는 뜻밖에 막힌 숨을 틔워주기도 한다. 이런 경험을 거치며, 관계의 깊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호감이나 함께 보낸 시간의 총량보다, 서로의 약한 지점을 얼마나 의식하며 보폭을 맞추고 있는지와 더 닮아 있었다. 가난한 사람 앞에서 부를 과시하지 않고, 배움의 이력이 다른 사람 앞에서 학벌을 앞세우지 않는 태도처럼, 결핍이 있는 이에게는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되는 말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배려는 같은 자리에 서보지 않은 이에게는 유난이나 과잉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 미묘한 온도가 어긋날 때, 관계는 눈에 띄지 않게 비틀어질 수 있다. 대개는 큰 사건이 아니라, 무심히 던진 말 한마디에 남은 냉기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대체로 무의식적으로 말을 건넨다. 악의도, 특별한 의도도 없다. 그러나 말은 종종, 화자의 마음과는 다른 곳에 닿는다. 남편과 사별한 친구 앞에서 부부의 일상을 꺼냈다가 “듣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다는 지인이, 내 앞에서는 또 자식 이야기를 분주하게 이어가던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과연 달랐을까, 질문은 자연스럽게 나를 향했다.


그늘에 서보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장면들이 있었다. 나는 엄마와 각별한 사이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이의 딸 이야기에 마음이 먼저 저릿해지고 나서야, 엄마와 거리가 있는 친구 앞에서 내가 얼마나 쉽게 엄마 이야기를 꺼내왔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이슬아 작가의 질문이 겹쳐졌다. 그는 「우리는 왜 번거로운 사랑과 우정을 해야 할까」라는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과 우정의 세계는 까다롭고 조심스러워요.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상대가 절대로 참을 수 없는 짓을 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관계를 맺어가고, 그 과정에서 그나마 나은 인간이 되어 갑니다.”

이 말은 관계를 낭만으로 꾸미지 않는다. 사랑과 우정은, 상대가 가장 아파하는 지점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얼마나 진심으로 붙들 수 있는가에 가까웠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했다.

“모른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어요.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과, 바로 그 말로 상대에게 다가가는 사람이요.”


회피로 끝나는 ‘모르겠음’과 질문으로 이어지는 ‘모르겠음’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다. 관계는 그 간격을 건너려는 노력이 멈추는 순간, 다른 얼굴을 갖게 된다. 그 문장은, 오래 매듭짓지 못한 한 관계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한 친구 앞에서 오래 흔들렸다. 그녀와 대화를 이어갈수록 내 안의 통증이 반응했고, 불편한 긴장은 침전물처럼 쌓여갔다. 함께 건너온 시간이 길었다는 이유로 쉽게 놓지 못했지만, 서로를 다독이던 시절은 이미 기억의 뒤편으로 물러나 있었다. 지금의 우리는 다정함보다 부담을 피해 말을 골랐고, 현재의 우리가 아닌 과거의 우리가 관계를 붙들고 있었다.


관계를 이어간다는 일은 시간을 견디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를 향한 마음이 아직 남아 있는지, 아니면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침묵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녀의 잦은 회피와 응답 없는 태도 속에서 조금씩 마모되고 있었다.


사람은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해요
아무리 헤어지기 싫어도
만남이 있었으니 지금의 헤어짐도 있고
지금의 헤어짐이 있으니
또 다른 만남도 가능해지겠죠

;

봄이 오면 새잎이 돋고
가을이 오면 잎이 떨어져요
그게 인생의 이치예요

— 법륜스님 「희망편지」


이 글은 관계를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다만 삶에는 붙잡아 둘 수 없는 흐름이 있음을 가만히 짚을 뿐이다. 사람뿐 아니라 삶의 국면에도 각자의 때가 있고, 어떤 만남은 더 이어지지 않음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다하기도 한다.

모든 관계를 끝까지 쥐고 있어야만 성숙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애정과 노력을 다했다면, 더 이어가지 않는 선택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나를 가볍게 놓아준다.






1. 새해 첫 발행 글이 어느새 백 번째 글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서툰 문장 곁에 머물러 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에도 백을 지나, 다음 장으로 꾸준히 걸어가 보겠습니다.




2. 새해 첫 북토크가 파주 운정에서 열립니다.

일시: 2026년 1월 24일 토요일 오후 7시

장소: 빅베어북 (파주시 송학 1길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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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이야기가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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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그대로, 활자는 더 넉넉하게, 조금 더 편안하게 다가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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