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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지 않을 나의 베프에게

by 송지영

시련 이후, 인간의 회복력과 삶을 지탱하는 힘에 관하여


2월 강연 제안을 받고, 계획서를 쓰기 위해 모니터 앞에 앉았다. 제목만 적힌 화면에 커서가 깜빡였다. 나를 지탱하는 힘에 대해 쓰려다 보니, 내 곁을 버티고 선 많은 얼굴이 연달아 지나갔다. 그중에서 Y가 떠올라, 우리가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다시 열어보았다.


Y와의 대화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웃고 떠들다 보면 누구의 엄마도, 아내도, 딸도 아닌 나로 남는다. 감정을 다듬을 필요도 없고, 마음을 준비할 필요도 없다. 흘러나온 말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의미를 붙이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한다. Y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사람 앞에서 경계를 세우지 않는 사람. 누구의 얘기든 지루해하지 않는 사람. 나에겐 친구이고, 펭귄에게는 형 같은 존재다. 처음엔 삼촌이라 부르더니, 어느 순간 형이 되었다.( Y는 시몬스를 형이라 부른다.) 서진이에게는 수학 선생님이었고, “우리 엄마, 아빠 잘 부탁해요”라고 남길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족보가 얼핏 복잡해 보이지만 각각의 관계를 묶는 건 마음뿐이다. 그래서 애틋하고 긴밀하고, 편안하다.


삶은 자주 예측을 비껴간다. 우리가 그리는 궤도대로 움직이지만은 않는다. Y가 그렇다. 사범대를 졸업하고 영화판으로 뛰어들었다가, 다시 교육의 자리로 돌아와 조금은 자유롭고 어딘가 다른 수학선생이 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뻔하지 않게 바라보고, 말 한마디에도 온기를 얹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공부하며 쌓은 실력은 친구들 영상 찍어주는 솜씨로 남았다는 게, 웃기고 조금 아쉽지만 덕분에 나는 종종 선물처럼 그 흔적을 받는다.

나는 또 어떤가. 가장 자유롭게 살 것 같았는데, 친구들 중에서 제일 먼저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는 길을 걸었다. 그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삶은 이런 식으로 틀을 벗어나고,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지난여름 책을 탈고하고, Y와 친구들과 함께 남해로 떠났다. 뜨거운 밤에도 불멍을 빼놓을 수 없어 불가에 둘러앉아 밤새 이야기를 태웠다. 다음날 아침, 햇살도 덜 오른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그날은 서진이의 기일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정원을 바라보는데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누나, 서진이 왔네."

서진이를 보내고 나서, 나비를 유난히 자주 봤다. 글벗 작가님이 나비는 사후 통신의 매개체라고 말해준 적이 있다. 선뜻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는데, Y가 먼저 말했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나지막이 웃었다.


바람 같은 그 친구가 있어 삶은 낡지 않았다. 그는 늘 어딘가로 향하자고 했고, 늘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10월 최종 교정을 마친 뒤 바닷가 캠핑을 떠났고, 또 그다음엔 부산 락 페스티벌을 꺼내 들었다. 과연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움직일 수 있었을까. 그는 가볍게 툭툭 던졌고, 나는 안 해본 것들에 손을 얹어보려 힘을 냈다. 한때 힙합 페스티벌을 누비기도 했지만 시련 속에서 모든 에너지가 사라진 듯했다. 그런 나에게 Y는 락 페스티벌 출연진들의 곡을 던지며 예습을 시켰다. 다른 친구의 대상포진 때문에 결국 페스티벌은 무산됐지만, 그 과정을 지나며 작은 재미의 감각을 조금씩 느끼게 되었다. 그와 있으면 낯선 세계가 다시 일상으로 연결된다. 상실이 남긴 세계만 붙들고 살던 날들에서,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숨을 쉬면서.


사람의 관계는 놀라울 만큼 정확하다. 서진이 기억회를 준비하던 날이었다. 누가 편지를 읽을지 의견을 묻기 위해 글을 올렸는데, 가장 먼저 도착한 이름은 두 개였다. 서진이가 가장 깊은 마음을 주었던 친구 하정(책 2화 등장)과 Y였다. 떠난 아이가 아꼈던 친구 대표와 어른 대표가 그날 편지를 읽게 된 것이다.

손 편지를 건넨 친구들은 여러 명 있었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글을 읽는 일은 다짐이 필요했다. 감정이 흔들릴 걸 알면서도 두 사람은 그 자리를 선택했다. 관계의 깊이는 그렇게 또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기억회 당일, 하정이가 먼저 편지를 읽었다. 친구들 중에서 가장 성숙한 아이로 알고 있었지만 이내 목소리가 떨렸고, 다른 친구들도 덩달아 흔들렸다.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Y의 차례가 되었다. 나는 알았다. 그는 분명 유머로 분위기를 끌어올릴 거라는 걸.


“서진이가 시험칠 때 엄청 떨었거든요. 손도 많이 떨고 실수도 되게 많이 했었는데, 지금 제가 이 앞에 서보니까 그 마음을 알겠네요.

원래 수능이 끝나면 누나랑 같이 베를린으로 여행 가기로 했었는데, 이런 일이 안 일어났었어도 환율 때문에 못 갔었겠다 싶어요.”

쳐진 분위기 때문인지 그는 편지를 곧바로 읽는 대신 이야기를 이어갔고 객석에서 작은 웃음이 흘렀다. 공기가 조금 가벼워지자 그는 아이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서진아, 그곳에선 편안하니.
그날 네가 마지막으로 보낸 카톡을 다시 읽었어.

이제야 늦은 답장을 쓰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면서 네 마음이 어땠을까.

다시 그 마음이 무겁게 다가온다.

사람이 떠나면 목소리부터 희미해진다더라.

우린 수업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은데 기억하려 해도 잘 떠오르지 않아.

덜렁거리면서 뛰어다니다 맨날 넘어지고 밝게 웃는 그런 모습들만 자꾸 생각이 난다.

넌 “그리워말고 추억해 주세요”라고 했지만, 나는 그리워하면서 추억할 거야.

지금도 이 모든 사람들이 널 그리워하면서 추억하려고 모였잖아.

널 보낼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널 보낼 마음이 없어.

가끔 나비로 날아와줘, 남해에서처럼.

우리 평안하자.

너는 그곳에서, 우린 여기서.

사랑한다, 서진아.


몇십 년 동안 편지를 써본 적이 없다며 너스레를 떨던 Y의 글은, 보내는 마음과 붙잡는 마음 사이에서 흔들리던 우리를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그 마음들을 지나고 나니 이상하게 허기가 졌다. 그래서 우리는 또 우리답게 씩씩하고 소란스럽게 뒤풀이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또 다른 친구가 인사 대신 시 한 편을 보내왔다.

〈밥〉
천양희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서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네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돌아보니, 덩그러니 혼자인 줄 알았던 내 자리에 나를 지켜주는 마음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었다. 우리는 참 우리다. 그 덕에 또 하루를 산다. 오늘의 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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