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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독자, 데드라인 아티스트

by 송지영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그 사이에 책 한 권이 완성되는 과정이 있다.


“저희 출판사는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과 만나는 것’이라는 모토 아래 인문, 에세이, 경제경영, 문학 등 여러 결의 책을 만들어왔습니다.”

메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단정한 인사였지만, 그 한 줄이 먼저 마음에 들어왔다. 우리 집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만든 출판사였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를 재미있게 읽었고, <마지막 끈을 놓기 전에>는 서진이를 잃은 이유를 찾고 싶어 한동안 곁에 두고 읽었던 책이었다.


편집자님은 19화 무렵 <널 보낼 용기>를 우연히 발견해 단숨에 읽었다고 했다. 그리고 20화를 올리기 직전 연락을 보내왔다. 연재의 막바지에 서 있던 때라 그 한 통의 제안은 ‘이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나’를 치유한 글이 ‘타인’을 치유해 주는 위무의 기능을 너머, 독자들로 하여금 지금 우리 시대 공동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으로까지 이끈다는 데에 <널 보낼 용기>에 큰 힘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어진 문장.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려는 나의 시도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마음 앞에서 이분과 꼭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이 단번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우리는 작년 이맘때, 수서의 한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편집자라는 직업을 책 냄새 가득한 문학적 존재로만 상상해 왔던 나에게 눈앞의 그녀는 단아하면서도 맑은 기운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 무렵은 집 밖을 거의 나가지 않던 시기였다. 누군가를 만나러 나오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뜨거운 음료를 흘릴까 봐 마시지 않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건만, 잔뜩 긴장한 탓에 손이 미끄러져 그대로 엎지르고 말았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설수록 스텝이 꼬이는 날 있지 않은가. 그날이 그랬다. 편집자님은 내가 민망해할까 봐 재빨리 움직였고, 알바생까지 와서 함께 도와주는 통에 얼굴은 불가마가 되어 버렸다. 그 이후로 어떤 질문을 받았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얼마 뒤 도착한 메일에는 이 책은 “필요한 책이고, 우리가 반드시 내야 하는 책”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무리 절실한 이야기를 품고 있어도, 그것이 책의 형태로 나아갈 수 있는지는 그 이야기를 ‘특별한 언어’로 바라봐주는 편집자를 만나는가에 달려 있다. 작업 내내 그 사실에 깊이 감사했다.


편집자님과의 작업은 온도도 속도도 자연스러웠다. 나는 세 꼭지씩 원고를 보내고, 그녀는 꼭 필요한 부분만 짚어주었다. 브런치 연재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내 감정의 세기가 글을 삼키는 건 아닌지, 그리고 어떤 장면이 이야기의 추진력으로 기능하는지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웠다는 점이었다. 편집자가 생겼다는 사실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건넬 수 있다는 안도감이기도 했다.


"1화에 서막이 되는 단서들을 조금 더 배치해야 독자에게 자연스러운 흐름이 된다는 점을 쓰면서 이해하게 되었어요. 2화는 감정의 진폭이 워낙 커서, 이 강도로 시작해도 괜찮을지 고민이 됩니다.”

그 시절, 나는 비슷한 질문을 자주 했다. 독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감정의 밀도를 가늠하기 위해 누군가의 눈이 필요했다. 편집자님은 내가 머뭇거리는 지점을 잘 풀어주었다. 그녀의 짧고 명료한 피드백은 다시 글 앞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책을 만드는 시간 동안 편집자님은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편집자이면서 동시에 동료 시민으로서 이 글의 흐름을 함께 고민해 주었다. 그녀는 지금도 내 이야기를 듣다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그 마음이 작업 내내 이 책의 결을 묵묵히 지켜주었다.

한 권의 책은 결국 작가와 편집자가 긴 시간을 견주어 만든 도착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한쪽에는 삶의 잔편을 붙들고 길을 찾아가던 내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그 흔들림을 하나의 구조로 엮어준 편집자가 있었다. 그 시간은 글과 사람, 두 방향이 맞물려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래서 이 책에는 나의 슬픔과 용기만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품어준다는 일이 어떤 힘을 지니는지, 그 조용한 동행이 책의 가장 깊은 층을 이룬다.

돌아보면, 그 과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위로였다. 나는 글을 쓰는 동안 그녀로부터 충분한 격려를 받았고, 그 온기가 이 책의 결에 고스란히 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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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푸른숲 인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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