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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주인은 누구인가

by 송지영

어떤 얼굴은, 처음 보는 순간에도 이상하게 내 안을 건드린다. <세계의 주인>의 주인이가 그랬다. 시끄럽고 수다스러운 모습이 여느 여고생과 다르지 않지만, 그 활기참 뒤편에 미세한 균열을 품고 있는 아이가 궁금했다.



어느 날, 친구 수호가 출소한 성범죄자의 지역 복귀에 반대하는 청원서를 돌린다. 서명란 위에는 “성폭력은 피해자의 삶을 파괴하며,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문장이 적혀 있다. 대다수는 별생각 없이 이름을 적지만, 주인이만은 무심히 고개를 돌린다. 폭력이 남기는 상흔을 가볍게 여기진 않지만, 그 문장이 누군가의 남은 생 전체를 규정하는 방식엔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명을 종용하는 수호에게 주인이는 네가 피해자들의 삶이 파괴된 걸 봤냐, 만약 네 동생이 피해자가 되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면 좋겠냐고 반문한다. 그렇게 주인이가 서명을 거부하는 순간은, 한 여고생이 스스로의 기준대로 세계의 언어에 선을 긋는 장면이다.



영화는 그 선택의 뒤편을 섬세하게 비춘다. 익명의 쪽지, 수군대는 말들, 곪아가던 긴장. 며칠 뒤 다시 서명판을 내미는 수호와 급식실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견디지 못한 주인이는 먼저 팔을 휘두른다. 학교폭력 심의위원회에 불려 간 자리에서 주인이는 왜 서명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그 문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를 담담히 말한다.

어둠이 내려앉은 자동 세차기 안, 물거품 사이로 빛이 미약하게 번지는 공간에서 주인이는 꼭꼭 숨겨두었던 울음을 터트린다.

“왜 지켜주지 못했어… 왜! 왜 그 어린 나를 그렇게 오래 혼자 뒀어!”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생수와 휴지를 건네며 곁을 지킬 뿐이다. 그 풍경은 그 두 사람이 이미 여러 번 비슷한 밤을 함께 건너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주인이의 오열을 보며 나는 나를 떠올렸다. 나 역시 주인이처럼 대부분 밝게 지낸다. 나의 슬픔은 펑펑 쏟아지는 폭포수가 아니라 잔잔히 물기를 머금은 스펀지에 가깝다.

딸의 기일날, 열 명의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친구들이 의도한 건지, 우연이었는지 묘하게 날짜가 겹쳤다. 선뜻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막상 떠나보니 괜찮았다. 그 이후로 매년 기일이 되면 차라리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니까.

친구들과 웃고 떠들다가도 해안도로를 달릴 때 부서지는 파도에 남몰래 눈시울이 젖고, 정원에 날아든 노란 나비에 가슴속이 저릿하게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아픔을 눈에 띄지 않게 접어두며 살고 있다.


그렇기에 내 삶 전체가 하나의 이름으로 환원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송두리째 부서진 인생’, ‘영영 회복할 수 없는 상처’ 같은 문구가 비극을 겪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손쉽게 부착되는지 이미 충분히 보아왔다.

어떤 이들은 깊은 어둠 속에 오래 걸터앉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서사가 한 방향만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나의 시간도 초반에는 균열로 가득했지만, 그 금을 밟아가며 다시 자신의 자리를 세우는 법을 배웠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생을 복구하는 힘이 단정의 반대편에서 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톱클래스 12월호 인터뷰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상실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고 했습니다. 살아내는 일이란 작가님에게 지금 어떤 의미인가요?

톱클래스 12월호

이 생각은 〈세계의 주인〉과 깊게 맞닿아 있다. 주인이가 단정적인 문장에 저항했듯, 아픔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아픔이 한 사람의 전부라고 여기는 관념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널 보낼 용기〉가 세상에 나와 묻고 싶었던 것도 이러한 고정된 언어들이다.
정신질환을 특정한 사람에게 귀속시키는 추측,

자살을 의지의 문제로 축소하는 시선,

유가족의 모습을 규정하는 유족다움의 이미지.


이런 관념들은 겉으론 평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의 세계를 무심히 잘라내는 힘을 지닌다. 그 말의 파편은 시간차를 두고 내 안으로 파고들어 스스로를 공격하는 목소리로 바뀌기도 한다. 의심과 죄책감, 되돌릴 수 없는 질문들로 자기 세계를 잠식하면서.

그러나 주인이가 자기 기준을 세우며 자신의 세계를 잃지 않았듯, 나 역시 어느 말에 발을 얹고 어느 말은 멀리 보낼지 스스로 결정하려 한다. 한때는 ‘남의 눈’이라는 잣대가 내 곁을 예리하게 긁어댔지만, 이제는 그 시선을 거르는 힘을 익히는 중이다. 세계의 주인은 ‘타인’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천천히 체득해 가며.

어떤 어둠을 지나왔는지와 무관하게, 각자의 주인이들이 자신만의 축을 지키며 의연한 얼굴로 자신의 삶을 이어가길 소망한다.




*최근 반가운 소식들이 있어 공유해 봅니다.


1.〈널 보낼 용기〉가 2쇄에 들어갔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 톱클래스 12월호

"누군가의 상실이 더 이상 혼자의 감정으로만 남지 않기를, 아이들이 보내는 신호가 다시는 묻히지 않기를. 송지영 저자는 그런 바람으로 자신의 상처의 기록을 세상에 꺼냈다. 그의 용기에 이제는 사회가 답할 차례다."

https://topclass.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35559


3. 프레시안 북스 - '살아내고, 사랑할게' 상실 뒤 삶을 이어가는 자살 유족의 이야기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5112817012081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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