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웃었다

by 송지영

사람이 한결같기가 어디 쉬운가. 그럼에도 연애 4년, 결혼 24년, 도합 28년 동안 남편은 늘 같은 온도였다. 크게 들뜨지도, 크게 동요하지도 않는다. 감정은 늘 비슷한 수위에 머문다. 파도 없는 바다처럼 고요하고, 그래서 심심한. 흔들림 없이 편안한 시몬스였다.

“나 달라진 거 없어?”
그는 이 질문 앞에서 늘 당황한다. 내 얼굴과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으며 단서를 찾지만, 변화를 좀처럼 포착하지 못한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색을 선명하게 바꿔도, 그에게는 알아볼 수 없는 세계다.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표정으로 상황을 넘기는 그를 보며, 나는 “어이구, 그럼 그렇지” 하고 기대를 거둔다.

티키타카가 요즘 연애의 필수라는데, 우리 대화의 공은 번번이 바닥에 툭 떨어진다. 핑퐁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이 남자의 무엇에 끌렸던 걸까. 재치 대신 묵직함을 가진 사람. 그의 변함없음이 좋았다. 며칠 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시몬스의 세차 용품


그는 차를 애지중지한다. 나는 정반대다. 어지간한 얼룩이나 흠집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불편하지 않다. 그는 운전 경력 내내 무사고고, 우리 집의 사고 기록은 전부 내가 썼다. 내가 사고를 칠 때마다, 그는 가슴을 부여잡고 묵묵히 수습을 맡았다.

세차에는 또 얼마나 진심인지, 매주 용도별 세제와 솔을 바구니에 챙겨 전문 요원처럼 세차장으로 향한다.

지난 주말, 낯선 곳에서 차를 빼다 앞의 봉을 보지 못하고 들이박았다. 붉은 철근이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범퍼 위로 굵고 붉은 선이 그어졌고, 아래쪽은 찌그러졌다. 한 번도 사고가 없었던 차였기에, 실망할 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현관문을 열자 시몬스는 잘 다녀왔냐며 반갑게 맞았다. 나는 대답대신 그에게 달려가 꽉 안았다. 안았다기보다, 그의 눈을 피하고 싶어 붙들어둔 셈이었다.

“여보, 살다 보면 힘든 일이 많잖아. 그 순간은 괴로워도 다 지나가지?”
“왜? 무슨 일이야?”

강하게 힘을 주어 당겼다. 그가 내 얼굴을 볼 수 없도록. 그는 사뭇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울어?”

나는 얼굴을 파묻은 채,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여보, 차 빼다가 범퍼 긁었어.”

“하… 놔봐.”

그래도 놓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서둘러 말했다.
“진짜 미안해. 근데 경보음이 오늘따라 안 울렸어. 소리도 안 나고, 봉도 안 보이고. 나도 너무 속상해.”
그는 어처구니없어하며 몇 차례 한숨을 내뱉다 결국 웃고 말았다. 몇 번 실랑이 끝에 나는 팔을 풀었다.


서비스 센터 견적은 250만 원이었다. 내가 또 긁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에—사실 나는 그냥 타고 다녀도 아무렇지 않다—정식 센터 대신 찾은 곳에서 23만 원에 말끔히 복구된 차를 다음 날 찾았다. 우리는 큰 산이라도 넘은 사람처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기분을 내고 싶어 맛집에 들러 메밀정식을 시켰다. 그가 좋아하는 명태 식해도 한 접시 추가했다. 수리비는 예상의 1/10이었고,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남편이 웃었다.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완벽하게 느껴졌다.

“봐, 순간은 괴로워도 다 지나간다니까.

그는 어이없는 듯, 반쯤 체념한 얼굴로 껄껄 거렸다. 저지르는 자와 수습하는 자. 오랫동안 굳혀온 우리의 분업이었다.


시몬스는 감정을 키우기보다 상황을 정리하는 쪽이다. 힘든 기색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상태를 짐작하려면 스무고개를 돌아야 겨우 윤곽이 잡힌다. 나는 그 수고를 덜기 위해 점수 방식을 고안했다.
“요즘 어때?”
“뭐, 괜찮아.”
“괜찮아 말고, 점수로 말해봐.”
“음… 9점?”

순간, 백 점 만점에 9점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몇 점 만점에 9점인데?”
“10점이지.”
“와, 엄청 높은 거자나. 그 정도면 얼굴에 좀 표시를 내셔도 되지 않나요?”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 퇴근길에, 요즘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


오늘? 나는 몇 시간 전을 더듬어보았다. 그는 늘 집으로 출발할 때 전화를 한다. 나는 그가 도착하기까지의 삼십 분 동안 저녁을 준비한다. 특별할 것 없는 반복이다.

“운전해서 집에 도착하면 해리가 반기고, 손 씻고 나오면 바로 먹을 수 있게 밥상이 차려져 있고,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하루 일을 나누고, 그다음엔 함께 운동을 하고. 이 정도면, 꽤 괜찮지 않나 싶더라.”

들뜨지 않은 목소리였다. 낮고 고른, 그래서 오히려 깊이 박히는.

퇴근길의 전화, 따뜻한 밥상, 식탁을 사이에 둔 대화. 오십 분 함께 땀을 흘리고, 이어지는 밤 산책. 눈에 띄는 사건은 없다. 그런데 이런 날들이 쌓여가고 있다.

기쁨을 크게 말하지 않아도 점수로 치면 9점쯤은 되는 날들. 물론 1점인 날, 2점인 때도 있다. 그래도 9점인 날이 많아지며 평균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 그가 말한 ‘괜찮은 요즘’은, 그런 뜻이다.


드라마처럼 한 번에 복구되는 인생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생활을 다시 배열하는 법을, 곁에 남은 것들을 아끼는 법을 알아간다.

어떤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 공백을 가운데 두고도 밥을 먹는 법을 익힌다. 별다를 것 없는 하루가 지나가고, 아무 일 없다는 사실이 저녁처럼 내려앉는다.

그의 “요즘 참 좋다”는 말을 들으며, 나도 속으로 따라 말한다.

그러네, 참 좋네.

그 말이 우리 입에서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살아내고 있다는 증거다.

그가 웃는다.




다음 주 설을 맞아 미리 인사드립니다.
편안하고 따뜻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연휴 동안 잠시 쉬어가고, 설 이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평안한 명절 보내세요.♡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