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킬로그램의 약속

by 송지영

“지난 5년 동안, 설과 추석 명절에만 모두 6천 마리가 버려지거나 길을 잃었는데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었다. 6천이라는 숫자보다, 그 안에 접혀 있을 얼굴들이 먼저 밀려왔다. 어떤 차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을 것이다. 어떤 눈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끝까지 놓치지 못했을 것이다.

나 역시 한때는 이런 뉴스를 남의 집 일로 흘려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세상이 부르는 이름이 달라져 있었다. '개' 대신 '강아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갔다. 욕설과 음식의 언어로 소비되던 단어가 어느 결에 관계의 이름으로 건너와 있었다. 가축에서 가족으로, 지배의 대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그 이동은 조용했지만, 돌이켜보면 꽤 거친 고갯길이었다.


초등학교 하굣길, 학교 정문 앞에는 종이상자들이 늘어서 있었다. 샛노란 병아리들이 마치 합창이라도 하듯 겹치는 울음을 냈다. 책가방을 멘 채 넋을 놓고 들여다보다, 어느새 내 손에도 병아리 두 마리가 얹혀 있었다.

집에 데려온 병아리들은 번번이 오래 살지 못했다. 세 번째로 온 병아리에게는 이름도 붙여주고 더욱 공을 들였다. 깃털이 단단해지고 제법 영계 티를 낼 즈음, 뒤뚱거리며 베란다 쪽으로 걸어가더니 5층 아파트 밖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 마당을 나선 암탉처럼, 바깥이 궁금해졌다는 듯이.

그날 이후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살아 있는 것을 맡는다는 건, 준비와 상관없이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그 무게를 감당하기엔 아직 가벼운 사람이었다는 것도.

호주에서 지낼 때였다. 현지인과 생활을 해보고 싶어 기숙사를 나와 하숙을 시작했는데, 첫날 아침부터 사달이 났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강아지’라는 말로는 감당이 안 되는 크기의 검고 누런 덩치들이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녀석들은 매일 아침 같은 방식으로 나를 맞았다. 그러나 나는 그 환대를 끝내 환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기숙사로 돌아갔다.


대학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도 개에 얽힌 기억은 편안하지 않았다. 복날이면 어김없이 한 마디가 날아왔다.
“송 선생, 보신탕집 예약 좀 해요.”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면 아직 닿지도 않은 냄새가 먼저 코끝에 걸렸다. 나는 닭개장을 시켰고, 그마저도 끝까지 비우지 못했다. 교수들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보양식이라 불렀다. 어떤 날엔 개였고, 어떤 자리에선 짐승이었고, 어떤 계절엔 아예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아들이 그린 해리

그런 내가, 강아지를 들였다.

“엄마, 강아지 키우고 싶어.”

아이는 한국에 돌아온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그 노래를 불렀다. 딸은 한 번 마음에 둔 것을 쉽게 내려놓지 않는 고집쟁이였다.

3학년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다. 가족들과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 유리창 너머로 무언가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었다. 보기만 하자며 들어선 가게 안, 솜뭉치처럼 작은 말티즈 한 마리가 유리 케이지에서 자기 좀 봐달라는 듯 팔짝팔짝 뛰었다. 크리스마스의 마력에 홀린 것처럼, 나는 그날 처음으로 강아지를 안아보았다. 손에 가득히 전해지는 따뜻하고 몰랑한 몸에서 심장이 팔딱였다.


아이는 어떤 강아지든 좋아했기에 종도, 색도, 크기도 중요하지 않았다. 해리는 아이의 설렘이 아니라 나의 기준을 통과해 그날 우리 집으로 왔다. 아이는 곧바로 사랑에 빠졌고, 그 시절 좋아하던 해리 포터의 이름을 따 해리라 불렀다. 언젠가 포터가 뒤따라오길 바라는 마음까지 함께 얹어서.

처음엔 아무것도 몰랐다. 뭘 먹여야 하는지, 얼마나 자야 하는지, 왜 짖는지조차. 검색창을 열었다가 손이 멈췄다.

"사지 말고 입양하세요."

나는 샀다. 생명을, 72만 원이라는 돈을 내고. 그날 밤, 해리 같은 강아지들이 어떤 곳에서 태어나는지 읽었다. 어미들이 교배를 위해 주사를 맞고, 새끼들이 경매를 거쳐 유리 케이지에 놓이는 과정도. 내 선택이 그 잔인한 구조의 마지막 고리였다. 그 글들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내가 건넨 돈이 어떤 고통 위에 놓였는지, 한 문장씩 들이댔다.

해리는 내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면서 이름도 없이 그 밤도 어딘가의 뜬장에서 몸이 닳도록 강제로 새끼를 낳을 어미를 생각했다. 그 밤, 수치심이 이불처럼 덮여와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되돌릴 수 없는 선택들이 있다. 나는 부끄러움에 머물지 않고, 내 잘못을 바로잡고 싶었다. 유기견 임시보호를 시작했다. 갈 곳이 없는 길 위의 생명들이 차례로 우리 집을 거쳐갔다. 병원에 데려가고, 씻기고, SNS에 예쁜 사진을 올렸다. 쉬는 날에는 트렁크에 사료를 가득 싣고 가족들과 보호소로 향했다. 철장 안의 얼굴들을 닦아주고, 잠깐이지만 볕 아래 함께 앉았다.

한 번은 예순 마리를 한꺼번에 구조한 단체에서 병원비가 모자라다는 연락이 왔다. 마침 친구들과 함께하던 계가 있었다. 쓰지는 않고 모아둔 돈이 제법 되었다.
“가방이나 목걸이 말고,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친구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돈을 보냈다. 병아리를 잃고도 이유를 묻지 않던 아이가, 개를 공포라 부르던 어른이, 해리를 산 그 밤의 수치심을 기억하며 조금씩 다른 선택을 해 나간다.


그사이 해리는 열 살이 됐다.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누나의 냄새를 아직 기억하는지는 모르겠다. 해리는 그저 오늘도 어제와 같은 하루를 산다. 밥을 먹고, 낮잠을 자고, 나를 기다린다. 그 단순한 반복이 내 일상의 바닥을 이룬다. 내 곁을 한결같이 지켜주었던 건, 이 삼 킬로그램의 작은 존재였다.

나는 늘 내가 해리를 산책시킨다고 생각했다. 하루에 두 번, 많을 때는 세 번, 정해진 시간에 목줄을 들었다. 날이 궂어도, 마음이 가라앉은 날에도. 책임은 나에게서 출발한 약속이었다.

그 약속이 나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다. 공기를 마시게 했고,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슬픔의 한가운데서도 세상은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해리의 보폭에 맞춰 배웠다.


가끔, 해리가 갑자기 줄을 당기며 앞으로 뛰어나갈 때가 있다.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멘 여학생을 보았을 때다. 해리는 주저하지 않는다. 마치 안다는 듯이, 그쪽을 향해 달려간다. 나는 줄을 잡아당기다가 멈추고 만다. 해리가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지 알 것 같아서.

어떤 기억은 설명보다 먼저 몸에 남는다.


우리 가족이 절망에 잠겨 있던 시간, 해리도 두 번의 큰 수술을 겪었다. 엉덩이에 연결된 두 뒷다리 뼈를 깎아낸 고관절 수술 뒤에는 일주일간 걷지 못했고, 회복한 뒤에도 집을 찾지 못할 만큼의 충격이 몸에 남았다. 후유증인지,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경련을 일으키고 여전히 절뚝인다.

절뚝이면서도 이 작은 존재는 나를 빛이 드는 쪽으로 이끈다. 아픈 다리를 끌며 힘내 걷는 해리를 보며 나는 말한다.

"해리야, 우리 오늘도 살아내자."


해리가 앞서 걷는다. 짧은 다리로 통통한 엉덩이를 세우고, 띵깡띵깡 부지런히, 자기 속도로. 나는 그 뒤를 따라 걷는다. 볕이 우리 둘의 등을 나란히 데운다.

헛헛함을 나란히 데리고, 우리는 오늘도 같은 길 위에 선다. 그것만으로 부족하지 않은 하루가, 또 시작된다.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