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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May 11. 2020

어떤 문제는 기약없이 함께 간다

007. 이사, 넌 한번도 쉬운 적이 없었지 (1)

  자취경력 10년, 서너 번의 원룸 이사를 경험했지만, 단 한 번도 쉬운 이사는 없었다. 사회 초년생일 때는 전세금을 마련하는 문제로, 나중에는 전세금을 돌려받는 문제로, 때때로 입주 날짜의 문제로, 집의 하자 문제 등등 이사할 때마다 단계별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혼하면서 원룸 탈출과 동시에 소원(그 당시 나의 소원은 침대에 누웠을 때 신발장이 보이지 않는 집에서 사는 것이었다.)을 성취했고, 또 다시 첫 번째 이사를 앞두고 있다. 
 
  내가 이사가 몇 번이고 겪어본 일이 얼마나 많은데, 까짓 거 이사! 싶을 줄 알았지만, 슬픈 경험이 많아서 벌써부터 두려워진다. 이사 경험만큼은 아플수록 단단해지지 않는다. 예전에 힘들었으니, 이번에도 힘들겠지.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이사가 열흘 앞으로 다가온 오늘, 연초부터 나의 근심걱정이었던 이사를 차근차근 기록해보기로 한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방안에서 한눈에 보인다. 볕이 잘 들고, 해질녘에는 방안이 주황빛으로 가득차는 집이다.  


01. 벌써부터 잊지 못할 집 


        우리 집은 서울 한복판에 있다. 그것도 아주 높은 곳에 있다. 신혼집을 구하러 여기저기 발품을 팔다가 우연히 이 집을 소개받아 들어갔는데, 십 몇 평정도 되는 작은 집이었지만, 파노라마 뷰라고 할 만큼 시원하게 나 있는 창에 서울 시내와 남산타워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뷰를 보고 바로 계약했다. 

       

     산꼭대기에 있는 집이라 마을버스가 있다고 해도 지하철역까지 한번 내려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술이라도 마시고 올라오면 정말 정신이 멀쩡해질 정도로 오르막길을 걸어야 했다. 그럼에도 집 가까이 갈수록 눈이 시원해지는 풍경 덕에 3년을 잘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일기 예보가 아니라 훤히 내려다보이는 서울 하늘을 보고 날씨를 가늠해보는 즐거움이 있었고, 도시가 비에 젖거나 안개 속에 잠기는 날, 눈에 덮이는 날에 집에서 창밖을 보고 있으면 마냥 기분이 좋았다. 잠잘 때 침대에 누우면 창으로 고스란히 달빛이 들어오는 풍경이 그토록 낭만적일 수가 없다. 이곳에서 우리는 친구를 종종 초대했고, 좁은 집에서 함께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고 음악을 들었다. 거실에 달린 작은 미러볼은 손님이 오는 밤마다 은은한 불빛을 집안에 가득 채웠다. 나의 첫 번째 신혼집의 풍경들은 아마 두고두고 잊지 못할 거다.    


        장점과 단점이 너무도 분명한 이 특별한 공간을 우리는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여러 가지 자잘한 이유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3년 동안 이 집의 장점을 충분히 누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느꼈던 소음, 좁은 공간, 관리비 등등의 문제가 시간이 지날수록 존재감을 키우기 시작했다. 


        어디로 갈지, 언제 갈지 모르겠지만 2020년은 ‘이사의 해’로 정하고, 새해에 ‘올해 이사 하나만 잘해도 우리의 2020년은 성공적이야’라고 선언했다. 그렇게 의지만 가지고 시작했지만, 이사를 늘 마음에 품고 있어서 그랬는지 2월쯤 진도가 나가기 시작했다. 어디에, 어느 정도 규모의, 어떤 형태의 집으로 옮길지 정했고, 우리는 4월이면 이사를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5월, 진작에 이사갔을 줄 알았지... 



02. 어떤 문제는 꼬인 채로 나와 함께 간다


        이번 문제는 전세금이었다. 집주인 아저씨는 코로나19를 운운하며, 계약이 만료되어도 집이 나가지 않는 한 전세금을 빼줄 수 없다고 했다. 자기는 돈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고, 심지어 왜 자기와 상의하지 않고 이사 준비를 했느냐고까지 했다. (부모님하고도 상의 안하는 문제를 왜 당신한테 해요...) 


  우리는 이미 전세계약이 만료됐고, 1개월 아니 3개월의 시간을 두고 이사 통보를 했지만, 집주인과의 대화는 속이 콱 막힐 만큼 답답한 대화의 반복이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집이 나가지 않고...” “지금 제가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집이 나가야만...” “선생님, 서로 양보를...” “우리가 이럴 수록 서로 배려를...” 


        서로 양보와 배려만 계속 외쳐대는 아저씨 때문에 우리는 이사 날짜를 최대한 미뤘는데, 아저씨는 도대체 무슨 양보를 하는 건지, 손 안대고 코푸는 심정으로 다른 세입자 구해야만 전세금 돌려주겠다는 입장에서 꿈쩍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애초에 전세보증보험을 들지 않았고(그땐 100만원이 너무 큰돈이었다. 하지만 어찌나 후회되는지! 엄마말 들을 걸. 여러분, 꼭 드세요ㅠㅠ), 법적인 것들을 검토해 봐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소송까지 뛰어들지 않는 한 전세금 문제는 집주인이 주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구조였다. 임대차 보호법은 임대인을 보호해주지 못한다. 


        코로나19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 집이 나가지 않아 결국 못 받은 전세금만큼 대출을 받아 이사를 가게 됐다. 집 주인과 통화를 할 때마다 화가 났지만, 남편과 나는 이사 문제가 장기전임을 인정했고, 조금도 손해 보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싸우는 대신에, 최대한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먼저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우선순위와 원칙을 정했다.


        첫째, 어쨌든 이사는 간다. 둘째, 기한을 다시 정해 집주인과 협상한다. 셋째, 협상이 틀어지면 법적인 조치를 취한다. 물론 협상한 기한 내에 집이 팔려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지만... 고로 넷째,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로 안달복달하지 않는다.(이게 가장 중요하다)  


집에서 보는 해질녘 도시 빛깔. 예전엔 은은하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흐릿흐릿하네...심정반영적인 풍경


         모든 것이 단계별로 깨끗이 마무리되고 넘어가면 좋겠지만, 때때로 어떤 문제들은 기약 없이 함께 간다. 이것만큼 미적지근한 일도 없다. 주변이 조용해질 즈음 잠복해있던 문제들은 걱정스럽게 수면위로 떠오른다. ‘만약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면 어떡하지?’ 갑자기 이런 가상 시나리오라도 시작되면, 30분 동안은 답도 없다. 나는 불행한 미래로 빠져들어 걱정에 걱정을 이어나간다. 


        그래, 어떤 문제들은 나와 같이 간다. 신경을 쓰되, 내가 그 문제를 앞서가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조치를 미리 취하되,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을 두고 미리 전전긍긍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끝을 모르는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사를 준비하는 동안, 집주인과 나름의 협상을 하는 동안 네 번째 원칙을 되뇌이며 몇 번이나 멘탈을 부여 잡았다. 알고 있었잖아, 이사 쉽지 않다는 거^^ 이제 시작인걸.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이사, 잘 갈 수 있겠지, 또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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