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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현 Oct 11. 2024

주말 풍경(1): 거미 인간

 이제부터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듣기 평가를 시작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수능 영어도, 토익 시험도 그의 의도를 해석하는 것보다는 쉬울 것이다. 출제 위원은 카야. 아, 그 사람이 누구냐고? 그렇다면 나도 그처럼 쫑알쫑알 쉴 새 없이 떠들 터이니 집중하고 따라와야 한다.


 린에게는 쌍둥이 아들 위로 딸이 한 명 있다. 이름은 미아. 미아는 일찍 결혼을 해서 세 살짜리 아들이 있다. 눈치챘겠지만, 그 카야가 바로 미아의 아들이다. 린은 스키니진을 입고, 엄청 큰 링 귀걸이를 하는 젊은 할머니였다.

 미아는 만삭이었지만 토요일마다 이 집에 왔다. 린은 마치 나의 외할머니처럼 절대 끼니를 거르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는 듯했다. 그래서 나와 동갑인 자신의 딸에게까지 나의 식사를 챙겨 달라 했던 것이다. 정말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딘-!

 카야가 왔다. 미아의 외침에도 이미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부른 것은 분명 자신의 외삼촌이지만, 목적지는 따로 있다. 바로 나의 방. 그는 배시시 웃으며 들어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늘 닫혀 있던, 코너의 그 하얀 문이 이제는 주말에 올 때마다 열려있으니 카야에게는 내 방이 그동안 억눌려왔던 호기심을 해소할 수 있는 놀이터가 된 셈이었다. 제이크가 집에 있었을 때는 카야가 나의 방문을 열라치면 ‘카야!’하고 소리를 치며 훌쩍 안고 데려갔었다. 제이크 삼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이 카야에게는 기회였다. 난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조금 도와준 것뿐이고. 참고로 딘은 쌍둥이였지만, 조금 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던지 나에게 말을 거는 상황을 극도로 피했다.


 저번 주에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했는데, 내가 그것을 못 알아듣자 단단히 화가 났다. 그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울었다. 달래기 위해 진땀을 빼고 있을 때, 옆방에 있던 딘이 한숨을 쉬며 방에서 나오자 ‘으아앙’ 하며 그에게 달려갔다. 그것이 우리 우정의 마지막 장면인 줄 알았는데, 그새 잊었는지 또 내 옆에 와서 쫑알쫑알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의 기억은 어른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는 전략을 바꾸기로 한 것 같았다. 내 손을 잡고 책상 위에 있는 노트북 앞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의자 위를 사다리 타듯 올라가서는 노트북을 열었다. 큰 눈으로 말똥말똥 쳐다보는데, 그의 욕망을 남인 내가 이렇게 쉽게 이루게 해도 되는 것인가 싶었다.

 노트북 전원을 켜자 무엇인가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행동 묘사 게임인 건가. 입으로는 ‘피슉, 피슉’이라고 하는데, 그런 단어와 멀어진 지가 너무 오래전이었다. 그러다 그가 작은 손으로 어떤 모양을 만들었을 때, 퍼뜩 무언가 스쳐갔다.

 “스파이더맨? 스파이더 맨 틀어달라고?”

 맞게 알아들은 건지 의아한 채로 스파이더맨을 보여주자 카야는 눈을 한 번도 꿈뻑이지 않고 입술은 반쯤 벌린 상태로 무아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집에서는 쉽게 이루지 못하는 ‘스파이더맨 보기’를 나를 이용하면 거뜬히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친구는 아니었던 건가.

 카야를 무릎에 앉히고 같이 스파이더맨을 보기 시작했다. 건물에 탁 붙어 날아다니고, 걸어 다니고, 어디든 가는 거미 인간. 카야, 네가 거미 인간이라면 말이야. 튼튼한 거미줄을 엮고 엮어서 그곳에 갈 수 있겠니? 이 집의 향기와 음악 소리, 쉘리의 농담과 재잘거리는 너의 목소리를 안고 갈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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