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소리 들리네> 1. 여름 바람

by 이소현

오전 11시는 산책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시간이다. 모두가 자신만의 하루를 시작하면 산책로에는 깔끔하게 나뿐이다. 내가 백수라서 그런가. 그럼 엄마는 재활 중이라고 정정하라 하겠지만. 그러나 이 산책도 가능한 40분 안에 마무리해야 한다. 정오가 가까워지면 아파트 단지 근처에 있는 관공서 직원들이 쏟아져 나온다. 굽이 높은 검은색 슬리퍼, 캐릭터가 그려진 슬리퍼, 지압 슬리퍼 군단이 지나간다. 그 집단을 피하려면 치밀한 관찰과 이토록 시시한 전략이 필요하다.

한여름이 되자 산책로는 오로지 나만의 것이 되었다. 종종 있던 소수의 산책 동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똑똑. 혀를 차자 고양이가 눈을 가늘게 뜬 뒤 다시 감는다. 나무 그늘, 대리석 바닥, 1층 에어컨 실외기 옆을 고양이들이 점령했다. 너도 덥냐. 나도 덥다. 쭈그리고 앉았다가 일어나니 휘청한다. 그대로 잠시 멈춰 서서 눈을 감았다.

사실 산책자가 된 지는 고작 3개월 차다. 지난 일 년은 집에만 있었다. 아, 이건 나가야만 한다. 나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어느 날 마음이 그랬다. 생에 대한 의지가 불타오른 것도, 쓸모없다는 생각을 타파하겠다는 목적도 아니었다. 평소처럼 소파에 앉아 있는데, 햇빛이 너무나 깊숙이 거실까지 들어왔다. 그게 전부였다. 인간이 빛을 받아야 하는 총량이 정해져 있나. 그것도 아니면 누가 내 몸에 엽록체라도 심어놓은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어어, 거기, 고양이 밥 주면 안 돼요.”

돌아보니 경비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고양이를 가리키면서 다가온다. 내려다보니 그 고양이는 자기 앞발을 열심히 핥고 있다. 밥 준 거 아닌데. 이 더위에 대해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달까요.

“아, 약국집이구나. 난 또.”

아저씨는 우리를 유유히 거쳐 아파트 외벽에 있는 버튼을 누른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열한 시 이십 분은 식물들이 더위를 식히는 시간이다. 경비실 뒤를 힐끔 보니 한 고양이가 그릇에 떠 놓은 물을 마시고 있다. 내 앞의 축 늘어진 고등어 고양이는 순서를 놓쳤다.

햇빛은 유독 날름 나온 발가락을 향해 내리꽂는 것 같았다. 발바닥과 발가락이 따가웠지만, 느긋하게 걸었다. 1층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늘이 생기면서 바람이 불었다. 고양이 두 마리가 한 기둥씩 차지하고는 등을 대고 누워있었다.

“학생, 지금 뭐 검사한대. 일루와.”

공동 현관문에서 뒤로 물러나 기둥과 기둥 사이의 평상을 봤다. 하농 할머니가 계셨다. 맞다. 승강기 점검하는 날이랬지. 하필 왜 이 시간에! 계단으로 걸어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저는 젊어요’라며 유세 떠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도 못 올라가세요?’라고 어른을 놀리는 것 같지 않은가.

“어디 갔다 오는겨?”

“산책…….”

하농 할머니는 진한 보라색 바탕에 흰 꽃이 그려져 있는 부채를 쥐고 있었다. 쇼핑 중독자인 하농 할머니에게 이런 부채는 서른 개가 넘을 것이다. 하농 할머니와는 두 사람이 앉을 만한 간격을 두고 앉았다. 똑 똑 똑 똑.

외벽에 붙어있는 호스에서 물이 흐르다가 살구색 벽돌에 막혔나 보다. 시원하게 뻗어가지 못하고 벽돌의 울퉁불퉁한 곳에 자꾸만 맺혔겠지. 물방울들이 고이고 고이다가 똑 똑 똑. 어떤 소리는 볼 수 없어도 보였다. 소리가 하농 할머니와 나의 사이를 메꿨다. 평소라면 회사는 어디 다니냐, 결혼은 했냐며 신상을 조사할 차례였다. 하농 할머니는 한 달 전의 일도, 1년 전의 일도 ‘그저께’라고 표현하는 사람이므로 이해하기로 한다. 하지만 웬일로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바람이 불었고, 하농 할머니에게서는 은은하게 식초 냄새가 났다.

금요일 연재
이전 07화<당신은 나를 부끄럽게 해요>를 마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