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달이달꿈

하얀이(2)

by 최여름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하얀이를 찾아왔어. 아픈 사람들과 슬픔에 가득 찬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하얀이가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들을 감상했어.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다시 사랑을 회복하기도 했어. 모두들 그녀를 사랑했고 또 그녀에게 위로받길 원했어.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하얀이는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어. 사람들이 하는 감사와 칭찬의 말들이 더 이상 하얀이에게 힘을 주지 않았지. 때론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기도 했어. 하얀이는 피곤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어.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인이 하얀이를 꼭 만나고 싶다며 찾아왔어. 그녀는 하얀이를 보자 아무 말도 못 한 채 눈물만 흘리기 시작했어. 하얀이는 그녀가 울음을 그치고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기다렸어. 하지만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질 뿐이었지.

‘뭐라도 이야기를 해야 들어줄 수 있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그녀가 울음을 멈추지 않자 하얀이는 하품이 나기 시작했어. 그동안 너무 피곤했던 거지. 그녀가 고개를 들어 하얀이를 바라보았을 때 하얀이는 잠들어 있었어. 맞아, 그녀는 말을 할 수 없는 여인이었어. 예전의 하얀이처럼. 그녀는 큰 상처를 안고 돌아갔어. 잠에서 깬 하얀이가 아무리 찾아봐도 그녀를 다시 만날 수는 없었지.

며칠 후 이번에는 수다쟁이 아가씨가 하얀이를 찾아왔어. 그녀는 아침부터 찾아와 하루 종일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았지. 그녀의 목소리는 바닷가의 갈매기들 소리 같았어. 게다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지. 참다못한 하얀이는 자신도 모르게 귀에 손을 대고 외쳤어.

“그만, 이제 그만. 입을 좀 다물라고!”

그러자 얼마 후 그녀의 입이 붙어 버렸어. 기억하지? 하얀이의 말에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다음 날은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찾아왔어. 그는 이가 다 빠져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게다가 귀도 잘 안 들려서 하얀이는 할아버지의 귀에 바짝 대고 소리를 질러야 했지.

“할아버지, 뭐라고요?”

“엥? 이런 고얀 녀석이!”

할아버지는 다짜고짜 지팡이를 높게 치켜들었어. 하얀이는 무서워 그 자리에서 도망을 치고 말았지. 도대체 할아버지는 하얀이의 말을 뭐라고 들으셨던 걸까? 머리끝까지 화가 난 하얀이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어.

“망할 영감 같으니!”

그 후로 노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얼마 가지 않아 개울가에서 발을 헛디뎌 몸져눕고 말았어. 이 소식을 들은 하얀이는 더 이상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어. 자신이 한 말들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겁이 났거든. 무엇보다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믿을 수 없었어.

‘아무도 들은 사람이 없겠지?’

천사의 말을 하는 하얀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아무도 믿을 수 없을 거야. 만약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모두 하얀이를 떠나고 말겠지. 하얀이는 사람들이 비난하고 손가락질할까 봐 너무 무서웠어. 그때 하얀이는 엄마의 말이 생각났어.

‘너는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단다.’

하얀이는 그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서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어. 더 이상 세상은 따뜻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들을 수가 없었어.

며칠 후, 사람들은 마을에 이상한 비눗방울이 떠다니는 것을 보았어. 투명한 고무공처럼 생긴 비눗방울 속에 안개가 가득 차 둥둥 떠다니고 있는 거야. 아이들은 신기해서 비눗방울을 졸졸 따라다녔어. 그러다 한 아이가 비눗방울을 잡으려고 손을 뻗은 순간 비눗방울이 터지면서 그 속에서 안개가 퍼져 나왔어. 그 안갯속에서는 이런 말이 들렸지.

‘망할 영감 같으니!’

또 다른 비눗방울은 터질 때 이런 소리가 들렸어.

‘입을 좀 다물라고!’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일인지 의아하기만 했어.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이 하얀이라는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 그 비눗방울은 하얀이가 사는 집에도 날아왔어. 하얀이는 그 자리에서 몸이 얼어붙고 말았어. 자신이 한 말이 하나도 사라지지 않고 다시 돌아온 거야. 비눗방울 타고 둥둥. 하얀이는 한밤중에 몰래 나가 비눗방울을 모두 터뜨렸어. 하지만 다음 날 아침 해가 떠오르면 어디선가 비눗방울은 다시 하얀이의 곁을 맴돌았어. 하얀이는 방에 들어가 문을 꼭 닫고 울기 시작했어. 깊고 어두운 밤이었어.

“말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일인 줄 알았다면 그런 기도는 하지 않았을 거야.”

하얀이는 엄마와 춤을 추던 그때를 떠올렸어. 하얀이를 바라보던 사랑스러운 눈빛과 마주 잡은 따뜻한 손, 행복한 웃음소리 속에서 하얀이는 잠이 들었어. 꿈속에서 하얀이는 엄마를 만났어. 엄마는 말없이 잠든 하얀이를 가만히 안아주었지. 그리고 부드러운 손으로 하얀이의 눈과 귀, 입술을 쓰다듬었어. 엄마는 말했어.

“너는 따뜻한 눈과 마음을 듣는 귀를 가졌단다. 너는 축복받은 아이야.”

“아니요, 이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을 수도 없고 위로도 할 수 없는걸요. 마음의 소리를 듣는 법을 잊어버렸어요.”

"마음의 소리는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란다.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라 먼저 너의 마음을 들어보렴."

“내 마음을요?”

엄마는 말없이 웃으며 하얀이를 바라보았어. 잠에서 깬 하얀이는 눈을 감고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들어주었어. 사람들에게 지치고 자신에게 실망한 여리고 어린 소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어. 하얀이는 아주 깊고 부드럽게 자신의 아픈 곳을 만져 주었어. 미운 가시들이 뾰족 솟은 거친 마음들까지.

‘괜찮아, 괜찮아. 부족해도 괜찮아. 실수해도 괜찮아. 있는 모습 그대로 날 사랑하는 분이 있으니까. 내 모습 그대로 언제나….’

다음 날 하얀이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어. 맛있는 과일과 빵을 챙겨 예쁜 바구니에 담았지. 가는 길에 여전히 비눗방울들이 있었지만 하얀이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어. 한참을 걸어 한 허름한 집에 도착했어.

‘똑, 똑’

“누구세요?”

조그마한 꼬마 아이가 얼굴만 빼꼼 내밀었어. 얼굴은 지저분했지만 눈동자는 유난히 맑게 빛나는 남자아이였어.

“안녕? 나는 하얀이라고 해. 할아버지 집에 계시니?”

꼬마는 고개를 끄덕였어. 하얀이는 문을 열고 좁은 집 안으로 들어갔어. 할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고개만 돌려 하얀이를 바라보았어. 할아버지는 그동안 더욱 쇠약해진 것 같았어. 자신을 보고 화를 내실 줄 알았지만 그럴 힘도 없어 보였지. 하얀이는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참으며 조심스럽게 할아버지의 곁에 앉았어.

“할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조금만 더 귀 기울이면 들을 수 있었을 텐데.”

할아버지는 손을 들어 꼬마를 가리켰어.

“으, 으, 으...”

하얀이는 할아버지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어.

“알아요. 저 아이 걱정돼서 오셨던 거죠?”

하얀이는 꼬마에게 빵을 보여 주며 오라고 손짓했어. 꼬마는 두 손으로 빵을 받고서는 제법 의젓하게 감사 인사를 했어.

“너는 이름이 뭐야?”

“예후.”

“예쁜 이름이구나.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제가 이 꼬마, 아니 예후 공부도 가르치고 잘 보살펴 줄게요.”

하얀이는 할아버지의 귀에 대고 큰 소리로 천천히 말했어. 할아버지가 또 이상하게 들으시면 큰일이니까. 할아버지는 두 손으로 하얀이의 손을 꼭 잡았어. 할아버지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렸어.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꼭 일어나실 거예요.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실 거예요.”

하얀이는 어느 때보다 더 간절하게 자신의 말이 이루어 지기를 바랐어.

다음 날 하얀이는 수다쟁이 아가씨를 찾아갔어. 그녀에게는 털이 하얀 고양이를 선물했지. 얼마 전부터 하얀이가 데려와 기르던 어미 잃은 아기 고양이였어.

"당신에게 좋은 말동무가 되어 줄 거예요."

고양이를 보자 아가씨의 닫혔던 입이 열렸어. 하얀이는 오랫동안 홀로 살아온 외로운 그녀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들어주었어. 알고 보니 그녀는 대단한 이야기꾼이었어. 크고 요란한 웃음소리만 빼면.

말없이 눈물만 흘리던 여인의 집을 찾는 일도 어렵지 않았지. 동네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말을 못 하는 여인이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거든. 하얀이는 다섯 살쯤 되는 여자아이와 갓 태어난 젖먹이를 안고 있는 그녀를 보자 눈물을 참을 수 없었어. 그녀의 남편은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 돈을 더 벌기 위해 집을 떠났다가 사고로 죽고 말았거든. 하얀이는 그녀의 아물지 않은 슬픔 앞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그녀를 안고 한참을 그렇게 울어주는 것밖에. 하얀이는 그녀의 집을 나서며 식탁 위에 어머니가 물려주신 목걸이와 편지를 두고 나왔어. 그리고 진심으로 그녀와 아이들을 축복했어.

집에 오는 길에 하얀이는 비눗방울이 모두 사라진 것을 알았어.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의 목소리가 천사의 목소리가 아닌 것도. 하지만 하얀이는 슬프지 않았어. 따뜻한 눈빛도, 마음을 듣는 귀도, 천사의 목소리도 사라졌지만 하얀이에게 또 하나의 문이 열린 것을 알았기 때문이야. 바로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문. 이 마음의 문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에 검은 천사도 빼앗아 갈 수 없었어. 하얀이는 그 마음 문을 열고 닫는 것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예후에게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어. 맑고 검은 하늘에 별이 참 많이도 반짝이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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