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 39:12
- 소년과 개
나그네는 또다시 갈래길 앞에 섰다. 잠시 길들을 살피던 그는 무심히 왼쪽 길로 들어섰다. 그에게는 목적지가 없었으므로 따로 길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그는 평생을 같은 곳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한여름 몰아친 기껏 하룻밤 폭풍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집과 담이 무너지자 그는 자신이 있던 세계가 말도 안 되게 좁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절망 대신 모험을 선택했고 신이 자신을 이끄는 것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여행은 그의 삶이 되었고 길이 곧 그의 집이 되었다.
한 소년을 만났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여행 중 흔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에게 목적지를 물었고 그의 여행이 가치 있는 일인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것 따위는 묻지 않았다. 소년의 관심은 다른 것에 있었다.
“예쁜 새가 죽어 있는 것을 봤어요?”
“뭐라고?”
“머리는 빨갛고 목은 노란데 날개는 파란 새 몰라요?”
“앵무새 말하는 거야?”
“그 친구 이름은 훌리예요.”
“그런 새는 못 봤는데?”
소년의 뒤에는 소년 키의 반쯤 되는 검은 개가 고개를 숙인 채 낑낑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목에는 소년의 손에서부터 이어진 목줄이 단단히 묶여 있었고 입 주변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개는 나그네를 보고 으르렁거렸지만 소년의 눈짓 한 번에 바로 고개를 숙였다.
“너의 개니? 아주 크구나.”
나그네는 개를 무서워했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낯선 이에게 달려들까 봐 목줄의 길이와 개와 자신과의 거리를 가늠해 보고 있었다.
“훌리가 제 새예요. 이 녀석은 침입자고요. 몰래 들어와서 내 새를 해쳤어요.”
나그네는 깜짝 놀랐다. 사납고 무서운 개가 주인도 아닌 아이의 손에 얌전하게 붙들려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너는 이 개가 무섭지 않니?”
“이 개가 내 새를 죽였다고요!”
“그 개가 너도 해칠 수 있잖아. 목줄은 네가 묶은 거니?”
그 순간 소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나그네를 바라보았다.
“내 새를 죽인 개가 무섭다고요? 내가 얼마나 훌리를 사랑했는지 모를 거예요.”
소년은 곧 눈물이 쏟아질 듯이 울먹거렸다.
“그 개가 네 새를 죽였다는 것을 어떻게 아니?”
“계속 훌리를 노렸으니까요. 훌리를 해치지 않았다면 제 손에 이렇게 얌전히 있을 리가 없잖아요.”
소년이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그네는 소년이 간 곳과 다른 방향의 길에서 소년의 앵무새를 발견했다. 역시나 길게 늘어진 목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소년은 당분간 자신이 사랑하는 새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개는 앵무새가 있는 방향과 다른 곳으로 소년을 이끌고 있던 것이다. 개는 ‘소년의 개’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사납고 큰 개가 소년의 손에 얌전히 굴복한 것과 소년이 개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같은 이유일 것이다. 힘은 사랑과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소년과 앵무새, 그리고 개의 엇갈린 사랑은 그렇게 한동안 소년을 엉뚱한 곳으로 이끌 것이다.
- 터진 주머니
나그네는 길가의 반짝이는 돌을 주워 들었다. 분명히 다른 것에 비해 특별한 구석이 있어 보이긴 했지만 가져야 할지 버려야 할지 애매했다. 일단은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주우러 오는 것은 힘들어도 버리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주워 든 것들이 호주머니에 가득 차 바지가 무거워졌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 주머니가 터져 버렸다. 다양한 크기의 돌에서부터 이름 모를 열매, 말라서 부스러기로 변해 버린 나뭇잎까지 주머니에서 줄줄 새어 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그네는 터져 버린 주머니를 보자 울컥 서러움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나그네는 이 여행의 길에서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다. 모든 것을 잃고 빈손으로 나왔지만 다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길 위의 시간들에서 무엇이든 의미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무엇을 찾아왔는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버리고 떠났어도 여전히 또 버리지 못하고 부지런히 모아 온 것들이 지금 주머니를 뚫고 자신의 맨살을 긁으며 바닥으로 쏟아져 내린 것이었다. 바닥에 흩어진 것들은 처음과 달리 참 보잘것이 없었다. 반짝임도 바래고 빛깔도 칙칙했다. 어떤 게 이 물건들의 참모습 일까. 나그네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았으나 눈물샘이 막혔는지 마른 울음만 삼켜야 했다. 여행 도중 짧은 인연을 만날 때마다 꺼내서 보여 주곤 했던 것들이다. 모두들 나그네의 수집품에 감탄을 했고 짧은 순간이나마 그것은 나그네의 자랑거리가 되어 주었다. 나그네는 이제 아무것도 담을 수 없게 된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절망의 그림자가 그의 머리 위를 스쳐 갔다. 몸은 분명히 가벼워졌지만 마음은 전보다 무거웠다. 저런 잡동사니들에 설렜던 자신이 부끄럽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해가 저물기 시작해 날씨마저 싸늘해졌다. 당장 어디 가서 몸을 뉘어야 할지 두려움이 몰려오고 있었다. 또다시 갈래길 앞에 섰을 때 그는 아주 오랫동안 방향을 정하지 못했다.
“세상에는 의미 없는 일도 있어. 그래서 의미 있는 일이 의미가 있는 거야.”
나그네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속삭였다.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행복했고 이제 버릴 줄도 알게 되었으니 또다시 채우고 버리는 일에 조금은 익숙해지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굳이 의미를 찾자면 못 찾을 것도 없었다. 삶이란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지만 결코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붓듯 그 진부한 채움과 비움의 과정에서 변화는 일어나고 삶은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