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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그린 Feb 20. 2021

영화 같은 런던 여행



런던 빅토리아 지하철 역 앞




평범한 주말 아침, 눈을 뜨니 문득 런던여행을 꿈꾸던 날들이 떠올랐다.


어설프게 비 내리는 아침에 우산이 없어도 뛰지 않는 사람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하철역 앞 잘 차려입은 양복쟁이 신사들,

거리를 둘러싼 다채로운 컬러와 도로를 누비는 빨간색 이층 버스들,

현대와 과거를 이어주는 갤러리의 수많은 예술작품들,


낡고 빛바랜 도심의 건물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아티스트들에게 열린 캔버스 된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런던에 발을 내디뎠다. 프랑스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캐리어를 질질 끈 채 런던 빅토리아 스테이션 역에 도착했다. 독특한 건물과 양복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캐리어를 무겁게 끌고 가는 우릴 위해 멀리서부터 문을 잡고 기다려주는 낯선 친절함이 있었다. 영국의 첫인상은 독특하고 아름다웠다.


초등학교 때 나는 엄마가 생일 선물로 큰맘 먹고 사주신 8만 원짜리 80일간의 세계일주 책을 닳도록 봤다. 두껍고 무거운 만큼 선명하고 광택 있는 종이에 세계 도시의 상징적인 건물들이 실려있었다. 맞벌이하시는 부모님과 학원에 간 언니가 돌아올 때까지 엎드려서 책을 펼치고 하나씩 따라 그렸다. 덕분에 나빠진 시력에 안경을 쓰게 되었지만 그렇게 자란 내 마음 한구석에는 어느새 세계일주의 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부루마블 게임을 하며 도시를 하나씩 정복해나가듯 구글맵을 보며 한발 씩 앞으로 내디뎌간다.


6년전 서유럽 패키지 여행으로 왔던 세시간짜리 런던여행은 장난같았다. 런던으로 가는 표는 비싸서 늘 가고 싶지만 당장 가게될 줄은 몰랐다. 어느날 언니가 여행을 가자고했다. 그말을 시작으로 이주 채 안남은 빨리 떠나는 비행기 표를 샀다. 그동안 모아온 가족 마일리지를 합산해 삼십만원짜리 세금만 낸 런던행 왕복티켓을 끊었다. 여유가 없던 내게 언니는 모든 경비를 내주어 영화처럼 공짜로 런던 여행을 가게되었다.


비가 내려 우울할 것 같았던 일기예보와 다르게 5월의 런던은 밝고 경쾌했다. 빅벤, 템스강 주변의 밀레니엄 브릿지와 낡은 발전소를 현대미술로 가득 채운 테이트 모던 갤러리, 런던의 재래시장 버로우 마켓, 햄프턴 궁전, 전 세계 역사를 볼 수 있는 런던 대영박물관, 유년시절을 함께한 해리포터 스튜디오까지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서 어디를 가야 할지 몰랐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도착한 호텔에서 따뜻하게 구운 웰컴 쿠키를 나누어주었다. 달콤한 초코칩이 쏙쏙 박힌 동그란 쿠키를 야무지게 먹고 어디를 갈지 결정했다. 집에서도 늘 재밌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가이드 같은 언니 덕분에 걱정은 없었다. 언니가 엑셀로 만든 여행 계획표를 보며 오늘은 할 일을 정했다. 일단 배가 고파 근처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주변을 둘러보다 가까운 음식점에 들어가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를 먹었다. 배를 채우고 밖으로 나오자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우리는 비를 피할 겸 근처 교회에 가는 중이었는데 영화의 한 장면처럼 어떤 남자가 돈을 위협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대머리 악당은 키가 크고 우람한 체격에 눈빛이 살벌했다. 지나가는 남자를 붙잡고 위협하고 괴롭히니 쉽게 지갑을 내주었다. 그걸 본 순간 놀라서 몸이 바짝 얼어붙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낯선 곳에서 불의를 보니 무서워서 더욱 피하게 되었다. 언니랑 눈짓을 주고받은 후 천천히 교회로 걸어갔다. 걱정되서 뒤를 돌아보니 지갑을 뺏긴 남자는 떠났고 아무도 없는 길에서 악당은 어느새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서둘러 들어간 교회 안은 다행히 사람이 몇 있었다. 악당이 나갈 때까지 기다린 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가진 것은 얼마 안 되는 하루치 여행경비와 여권이었지만 외국이라 혹시 모를 사고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 우범지역을 표시해두고 치안이 좋은 동네에 숙소를 잡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안전은 확신할 수 없었다.




비를 맞고 감기가 걸린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 추워져서 감기약을 사러 갔다. 평소처럼 말을 하려는데 영국 사람에게 영어를 쓴다고 생각하니 긴장되서 말이 자연스레 나오질 않았다. 친절한 약사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농담을 던졌고 코를 세척할 수 있는 바다 소금물 스프레이와 감기약을 내주었다. 숙소로 돌아가 따뜻하게 옷을 입고 뮤지컬을 보러 출발했다. 숙소에서 이십 분 정도 걸어가니 버스정류장이 나왔다. 우리도 런던 사람처럼 그들의 일상 속에 스며든 채 웨스트엔드로 가는 이층 버스에 올랐다.


런던 버스 ⓒ 2020. green all rights reserved


london ⓒ 2019 green.


흐리던 날씨가 맑아지고 버스를 타고 달리는 동안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런던에 오면 꼭 이층에 타봐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쌀쌀한 날씨에 올라갈 엄두를 못 냈다. 오늘 뮤지컬을 보러 갈 계획은 없었는데 운이 좋게도 언니가 25파운드, 3만 원대 티켓팅에 성공해 바로 보러 가게 되었다. 티켓부스의 직원에게 예약을 확인하고 표를 받았다. 기둥 근처의 좌석이라 저렴했지만 오페라의 유령을 실제로 볼 생각에 개의치 않았다.


미국에 브로드웨이가 있다면 영국에는 뮤지컬 거리인 웨스트엔드가 있다. 그 유명한 웨스트엔드의 여왕폐하 극장(Her Majesty’ Theater)에 도착했다. 1700년대에 개관한 300년 된 유서 깊은 여왕폐하 극장의 오래된 건물은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외관과 다르게 건물은 생각보다 좁았고 우리나라 분위기와 다르게 공연장 바에서는 맥주와 와인, 안주거리를 팔고 있었다.


오페라의 유령은 크리스틴이라는 아름다운 여주인공을 두고 흉측한 외모를 가면으로 가린 팬텀과 다른 남자 배우 라울과 경쟁하는 내용인데 내가 보기엔 악역은 없고 사랑을 구애하는 두 남자처럼 느껴진다. 어렸을 때는 팬텀이 공포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웠던 것 같은데 다시 보니 사랑꾼 같았다.


좋아하던 영화라서 집에서 ost를 자주 듣지만 현장에서 직접 듣는 것 차원이 달랐다. 뮤지컬 공연 내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덕분에 장면들이 생생하게 실감 났다. 배우들의 부드러운 음색과 오케스트라, 극적인 연출에 극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중 아름다운 외모의 크리스틴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배우의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가 think of me 노래에 잘 어울렸다. 팬텀이 배를 타고 나타나는 장면을 비롯한 소품과 연출이 너무 탄탄했다. 아는 내용인데도 감동이 밀려와 눈물이 났다. 환상적인 공연에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가족들 생각이 났다. 몰입도가 높아서 2시간 30분 정도의 공연시간이 너무도 짧게 느껴졌다. 끝내 팬텀의 맨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막이 내리고 배우들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귓가에 영원히 맴돌 것 같은 여운이 남았다.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코로나 이전의 여행이 그리워진다.



오페라의 유령 티켓
여왕폐하 극장(Her Majesty’s The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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