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후회를 줄여나가는 연습
- 소설 <수확자>를 읽고나서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음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심오하고도 어려운 질문이자,
태초의 인간이 존재한 이후 정복하지 못한 가장 큰 두려움이다.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겐 무섭지만 막연한 미래의 일이고,
인생이 값진 이유는 죽음(끝)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닐 셔터먼의 장편 소설 <수확자>는 질병과 고통, 죽음이 사라진 미래 지구의 이야기다.
죽음이 사라져 인구가 포화된 지구의 지속가능성과 효율성을 위해
사람의 목숨을 '수확'하는 수확자들의 이야기다.
이 소설은 나에게 죽음에 대한 의미를 다시 일깨워 줬다.
소설 속의 수확자는 무한한 지구를 유한하도록 만들어주는 신과 같은 존재다.
미래인들에게 질병이란 역사책 속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이었고
다치거나 재생이 불가한 상태가 되면 재생센터에서 되살아날 수 있으며,
자연 죽음은 없지만 가끔가다 재수없으면 수확되는 것이었다.
그런 미래인에게 죽음을 선사하며 더 큰 선 공동선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바로 수확자인 셈이다.
수확자들마다 죽음을 다루는 방식 차이가 있었다.
보수파는 죽음을 애도하고, 예를 지킨다.
진보파는 과거 사망시대(현재 우리가 사는 죽음이 존재하는 시대)의 죽음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죽음을 통해 진정한 나를 찾으라 말한다.
진보파는 사람의 목숨을 수확하는 것이 아닌, 살인의 방식을 띄고 있다.
죽음의 아픔과 끔찍함을 선사한다. 지나치게 잔인한 방법으로.
이분법적으로 봤을땐 당연히 나쁜 놈들, 악당이다. 사이코패스고 천벌받아 마땅한 놈들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니 진보파가 의미하는 바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살인의 방식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한 방법은 존중받을 가치도 없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 중 의견이 일치하는 것이 딱 하나 있었는데, 예고도 없이 준비도 없이 죽음을 시행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죽음은 사고와 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내가 대비할 수도 없고 준비할 수도 없다.
(물론 병마와 싸우다 돌아가시는 분과 같은 경우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천둥 번개, 비, 눈과 같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비극인 것이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이렇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될 때면,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필연적으로 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고통과 권태를 오가는 시계추"라 삶을 표현한다.
어차피 삶은 고통과 권태로 대부분 구성되었고
행복감은 목표를 이루는 성취의 과정에서 맛 볼 수 있는 잠깐의 감정일 뿐이라고.
권태롭다면 그건 나름대로 평화롭고 행복한 상태인 것이다.
죽음은 오늘 갑자기 올 수도 있고, 50년 뒤 찾아올 수도 있다.
언제인지 모르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미리 준비할 수도, 준비할 수 없기도 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언제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초연히 맞이할 수 있도록
내 인생에 최선을 다하고, 후회를 줄여나가는 연습을 하려고 한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