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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미 Dec 08. 2018

제주 사람들은 동백나무를 심고

Jeju island, Republic of Korea, Asia

4월이 시작되는 그 무렵 제주에는 벚꽃이 지고 동백꽃이 폈습니다. 창 밖 햇살이 뜨거워 가디건을 벗으며 500번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언덕을 오르다 보니 학교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습니다. '4월엔 동백꽃을 달아주세요'라는 현수막이 달린 부스와 하얀 국화꽃, 학생들의 왼쪽 가슴에 동백 뱃지, 식당에 틀어져 있는 JIBS(제주 방송) 4.3 추모 행사 생중계. 그런 4월 3일은 처음이었습니다.


제주 4.3 사건이 생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 즉 일제 해방 직후부터 군사정권의 시기를 말합니다. 6년의 긴 시간 약 3만 명의 제주도민이 '학살' 당했습니다.


시작은 ‘무정부 상태’였습니다. 일제 해방 이후 북한은 소련군, 남한은 미군의 지도 하에 놓입니다. 이들은 한국 정부 체제가 공산주의로 갈 것인지, 민주주의로 갈 것인지 논의합니다. 절충점이 생기지 않자 UN은 감시 하에 투표를 진행할 것을 해답으로 놓습니다. 북한의 선거구는 100개, 남한의 선거구는 200개로 민주주의 체제 당선이 확실한 상황에서 소련은 투표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UN은 ‘북한이 투표를 거부한다면 남한 총선거를 진행하라.’고 하였고, 남한 총선거가 이루어진다면 남한만의 정부가 세워질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통일 없는 남한 정부를 우려한 김구 등 핵심인물들은 선거를 거부하며 출마하지 않았으나 선거는 진행되었습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총선거에 유일하게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지역이 있습니다. 바로 제주입니다. 정부와 미국은 선거를 거부한 제주를 반미세력, 빨갱이라 여기고 제주에 경찰을 추가 파견합니다.


추가 파견된 경찰들은 친일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은 밤, 낮으로 제주 사람들을 괴롭히고 억압했습니다. 1947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으로 관덕정에 경찰과 민중이 모였습니다. 그때 경찰의 말발굽에 6살 먹은 아이가 치여 쓰러졌지만 경찰은 쓰러진 아이를 보고 그대로 지나갑니다. 화가 난 민중이 사과하라 항변하자 경찰은 이를 폭동으로 판단해 시민 6명을 쏴 죽였습니다. 제주의 경찰서들은 사과 성명서를 발표하며 단체 파업을 합니다. 정부는 이를 ‘반동’으로 간주해 '제주도 토벌작전'을 펼칩니다. 사람들은 경찰을 피해 오름으로, 동굴로, 한라산으로 숨었습니다. 그러자 정부는 ‘해안선 5km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폭도로 간주한다.’고 공포하였습니다. 산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을 끌어내기 위한 것입니다.


경찰 중 탁성록은 마약 중독자였습니다. 여자들을 성폭행하고,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반동자라며 죽였습니다. 그는 육지로 가기 전날 동거하던 여자를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9연대 보급과 선임하사 최길두 증언
60대 노부부가 2살, 3살 난 아이를 데리고 동굴로 숨었습니다. 그때 아이가 ‘응애’하고 울자, 경찰은 즉시 동굴로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 4.3 사건 진상 규명 자료
내가 외도지서 특공대 생활을 할 때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이윤도(李允道)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 가족’을 지서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꼴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 - 외도지서 특공대원 고치돈씨의 증언


사람들은 제주를 벗어나려 했습니다. 물 건너 전라도 해남 마을로 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부와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 사람은 빨갱이'라는 인식이 강해 호적을 바꿔야 했습니다. 한국 전쟁 해병대 모집은 제주 남자들에게 기회였습니다. '빨갱이'의 인식을 없애며 제주를 벗어나는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인천 상륙작전 해병대 1기는 80%의 제주 출신 남자로 결성됩니다.



제주가 '침묵의 섬 제주'라 하다만 저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4.3 사건 이후 제주 토벌 작전 관련 이야기는 모두 금기되어 경찰의 가해, 살인행위는 철저히 은폐되었습니다. 당시 사건 내용을 다룬 '순이삼촌'을 발간한 현기영 작가는 반동자라는 명목으로 잡혀가 고문을 당합니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 4.3 백비


4.3 백비(白碑). 이름 짓지 못한 역사.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등으로 다양하게 불려 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 제주 4.3 평화공원


50년이 지나서야 제주 4.3사건에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 유족들의 증언으로 학살의 성격이 밝혀지며 진상규명을 위한 ‘제주 4.3 사건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였습니다. 2014년, 4월 3일이 '4.3 사건 희생자 추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지금 제주 4.3사건은 '학살', '항쟁'등 이름 하나 갖지 못한채 여전히 '사건'으로 불립니다.


4월의 제주


제주도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4.3 사건에 대해 들으면 어때?" 친구가 답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4.3 사건과 관련된 숙제를 해서 솔직히 지겹다고 생각한 적도 많아. 근데 고등학교 때 충격적인 일이 있었어. 현장학습으로 4.3 사건 평화 공원에 갔는데 생존자 사진에 옆집 할머니 할아버지 사진이 걸려있는 거야. 그때부터 4.3 사건에 대해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게 됐어. 멀리 있는 남 얘기가 아니었던 거지."


동백꽃이 피는 4월, 제주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합니다. 동백꽃 배지를 가슴에 달고, TV마다 추념식 생중계를 틀고, 그날을 추모하고 기억을 되짚습니다. 당신의 4월 3일은 어떤가요. 제주 4.3 사건은 제주의 역사인가요, 대한민국의 역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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