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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미 Nov 07. 2019

장애라는 단어는 망했다

장애라는 단어는 망했다. 장애인 스스로 본인이 장애인이라 말할 때 멋쩍고, 듣는 사람은 '앗'하고 움츠러든다. 보건복지부는 장애인과 장애우의 명칭을 갖고 오랜 시간 들끓었지만 현실은 장애라는 단어 자체가 오염됐다. 우리가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학생지원센터에 까만 뿔테 안경을 쓴 학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어요?" 그녀가 내 눈을 보고 답했다. "제가 장애인인데요. 도움을 좀 받고 싶어서요." 센터 직원들과 학생들이 일제히 그 학생을 봤다. 누구도 이렇게 본인이 장애인이라고 당당하게 소개하는 학생은 없었다. 학생은 재차 말했다. "저 정신장애 3급인데 졸업 조건 때문에요."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학생을 자리로 안내했다. 다행이다. 이런 사람도 있어서.

신념이 하나 있다면 하이데거의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다. 그는 읽고 쓰는 언어가 관념, 행동 등 모든 것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한국말에는 존댓말과 반말이 있다. 존댓말은 나이에 따른 존중이라는 상하관계가 생긴다. 그래서 초등학생이 팔십된 할머니에게 "안녕 지숙아?"하고 인사하는 친숙한 미국 문화가 없다. 언어의 변화는 사고의 변화를 일으킨다. 우리가 여대통령, 여교사, 여배우라는 단어를 들으면 생각한다. '아 성차별적이네’ 나아가 성차별적 관습, 문화에 예민해진다. 장애도 그 차례다.


우리들 말속에 장애라는 단어는 병들어 있다.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거나, 어깨를 다쳐 한쪽 팔을 못쓰게 된 사람에게 "너 장애인 같아", "장애인 됐네"라는 말을 한다. 다치고, 아프고, 병들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실제로 장애인을 지칭하려는 경우 '장애인 분들', ‘장애를 가진 친구들'등 온갖 단어를 짜내며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피한다. 장애인을 나쁜 의미로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 장애인은 나쁜 말이 아니다. 우리가 못되게 쓸 뿐이다. 병든 인식을 바꾸러면 병든 말부터 바꿔야 한다. 스물둘에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은 친구가 있다. 의사와 가족들은 장애등록신청 절차를 권유했지만 친구는 거절했다. 다리를 다친 건 맞지만 지체 장애인이 된 건 인정할 수 없다는 거다. 장애라는 말이 옳게 쓰였다면 그녀를 설득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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