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형 인간의 Do not list

나는 여전하지만, 여전하여서

by 지하경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차(茶) 선물을 받았다. 그분 집에 초대받았던 날,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여러 종류의 차들이 떠올랐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건네받는 차 선물은 분명 조금 더 특별하다. 더군다나 커피를 좀 줄여볼까 싶었던 참이라 더욱 반가웠다.

나는 커피에 꽤 의존적인 사람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스프레소 3샷이 든 벤티 사이즈 아메리카노를 하루 3잔, 많게는 4잔도 마셨다. 그에 비해 순수한 물을 마시는 양은 점심 식사 후 2잔, 자기 전 한잔이 전부였다. 따져보니 간극이 크다. “혈관에 커피가 흐르겠다”, “물처럼 커피를 마신다”는 핀잔도 종종 들어왔지만, 습관처럼 손이 갔다.

커피를 줄여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불면과 몸의 컨디션 난조가 길어졌던 경험 때문이다. 한동안 원인 모를 미열이 이어졌다. 병원에서 피검사를 하고 염증수치를 체크했지만 결과는 정상범위였다. 다행이면서도 불안했다. 하루 중 언제든 38도 근방에서 어물쩡 머무는 체온을 확인하면, 짧은 한숨이 나기도 했다. 단순히 기초체온이 높은가 보다 치부하려 해도, 열감으로 인한 두통은 몸과 마음을 금세 무겁게 만들었다.

새벽까지 잠 못 들던 날, 긴 생각 끝에 커피를 끊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 철저히 ‘커피형 인간’으로 살아온 탓에 커피를 마시지 않는 하루는 너무나 맹숭맹숭했다. 며칠 커피를 끊어보니 알 수 있었다. 커피를 마시지 않겠다는 ‘커피 욕’은 외면할 수 있어도, 커피가 필요한 순간의 ‘기분값’은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름의 대안으로 '맛없는 커피는 마사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정하게 되었다. 줄여서, [맛없컾]이라고 명명한 이 명제는, 올해 나의 Do Not List 첫 번째 항목으로 기록되었다. (번외로, 나의 Do not list에는 '밥 먹을 때 다리 꼬지 않기'가 포함되어 있다.) 맛있는 드립 커피를 가끔 내려주는 동료 덕분에 이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분은 나의 ‘맛없컾’ 지론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맛있는 커피는 언제 배달될지 알 수 없다. 덕분에 기대감과 더불어 함부로 맛없는 커피를 선택하지 않는 신중함까지도 얻게 되었다. 마치 마시멜로 실험에 참석한 아이처럼 말이다.


느슨하게 세워 둔 Do Not List의 결심은 본격적이지도, 완벽하고 싶지도 않은 마음 그 자체가 담겼다. 필요충분조건으로 반드시 ‘커피’ 여야만 하는 순간에, 내 기분값을 위해 초록불을 켜줄 요량으로 말이다. 좀 엉성하고 싶었다. Must 가 아니라 Should의 부드러움으로 커피형 인간을 다독이고 싶었다. 그러니 Do Not List는 나를 위한 다정한 권고이면 충분하다.

따뜻한 차 한잔을 옆에 두고 이 글을 적는 지금도, 맛있는 커피 한잔이 도착한다면, 도리 없이 명료한 행복값을 선-지불하게 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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