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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롱 Sep 27. 2021

임신 하기에 '완벽'한 때는 없었다

단호박 한 줄의 슬픔

2세 생각은 줄곧 있었다. 애초에 남편을 평생 함께 하고 싶은 사람으로 생각한 이유 중 하나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남자'라는 이상형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연애를 하며 미래를 그려보았고 그 청사진에는 자녀 계획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다만 나는 둘이 좋을 것 같다고 했고 남편은 하나여도 되지 않을까 했다는 점 정도가 차이였을까?


결혼을 했다고 자연스럽게 아이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임신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보다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직업 없이 결혼을 했고, 신혼 생활과 함께 취업 준비를 시작했으니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남편도 내가 취업할 수 있기를 바랐다. 각자의 삶에서 이루는 성취는 나에게 특히 중요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학 시절, 대학 다닐 때부터 커리어를 쌓고자 부단히 노력해 왔고 해외 취업에 성공해보겠다며 곧이어 대학원에 진학했다. 다행히 정유회사의 수습사원이 될 수 있었고 그렇게 바라던 꿈을 이룬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눈앞에 그보다 더 원하는 것을 발견했으니 그건 지금의 남편이었다. 금세 사랑에 빠졌고, 나는 이 사람 이어야 한다는 확신이 들어 결혼을 하기로 했다. 해외 살이라는 계획을 수정했다. 남편을 따라 한국에 들어가 살겠다는 소식에 부모님도 지인도 적잖이 놀란 듯했다. 어디에 가도 금방 취업하고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을 거라는 오만함도 한 몫하긴 했다.


수십 개의 원서를 내보고 한국 취업 시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경력은 애매했다. 적어도 해외에서 몇 년은 일하고 해당 직군에 대한 익숙함이라도 있어야 경력직으로 어디든 내밀어 볼 수 있었다. 서류 탈락의 비보를 접할 때마다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어느 순간 교만은 내려놓고, 대학원이고 나발이고 관계없이 대졸 공채, 신입, 업종에 관계없이 지원할 수 있는 모든 곳에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내 앞가림을 못하는 상황에서 2세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신혼 생활의 기쁨은 없지 않았으나 현실의 벽은 너무나 빨리 내 앞에 나타났다. 그러니 아이는 조심해야 했다. 적어도 취업할 때까지 만이라도. 안 그러면 내 인생은 없어져 버릴 것 만 같았다. 지금 당장은 아이보다 내가 중요했다. 서울에서 내가 설 곳을 찾고 난 뒤에 아이는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취업 준비생의 하루도 바쁘게 돌아갔다. 매일 컴퓨터를 켜고 앉아 한참 자기소개서를 쓰고, 내고, 통보를 받기를 반복했다. 가열차게 문을 두드리면 언젠가 하나는 열리겠지.


다행히 나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취업은 했지만 여전히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국내 기업 문화를 과소평가했는지도 모르겠다. 임신은 축하받아야 할 일생일대의 행복으로 여겨야 마땅하지만, 스스로조차 지금 임신하면 회사에서 욕먹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직장에 처음 다니기 시작하고 주위 사람들이 내가 기혼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물어본 질문이 자녀 계획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아가기 전에 곧 출산휴가를 떠날 사람으로 각인되는 것이 싫어서 그 질문에는 손사래를 치곤 했다. 아이는 부서에 적응하고 가져도 된다고 생각했다. 너무 낭만이 없나? 결혼도 자녀 계획도 모두 현실이었다.


가족계획이라는 말이 있듯 요즘에는 많은 부부가 계획해서 아이를 갖는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삶이 조금 안정될 무렵, 적어도 사회에서 조그마한 나의 자리는 찾고 2세를 맞이하고 싶었다. 그것도 일종의 '아이 키울 준비'라고 여겼다. 직장에서 승진을 했고, 부서의 선배들도 하나둘 출산 휴가를 떠났다. 마음 한구석에 미뤄두었던 계획을 다시 꺼내보았고 어렴풋이 우리도 이제 슬슬 아이를 가지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꼬물꼬물 한 신생아 사진이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고 신랑과 2세 이야기를 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비타민도 매일 까먹는 우리가 엽산을 챙겨 먹고 병원에 가서 산전 검사도 받았다.


시작부터 완벽한 아이를 꿈꿨다. 좋은 것을 보고, 듣고, 먹고, 마시면 부부의 몸은 아주 건강해질 것이고 둘이 행복하면 아이는 절로 생기는 줄 알았다. 임산부 선배에게 임신 비법을 묻기도 하고 로맨틱한 식사를 하기도 했다. 한 달에 한번 아이가 찾아올 수 있다는 마법의 시간, 일을 마다하고 부리나케 귀가했다. 2세를 준비하는 일은 일종의 행복이었다. 아이가 있어야만 완전한 가족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매달 임신을 바라며 임신 테스트기를 꺼냈다. 기다리던 아이가 아니라 붉은 그녀가 찾아온 순간은 참으로 아쉬웠지만 금세 털어냈다. 이번이 아니면 다음 달이면 되고 꼭 지금이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몇 월 생이 좋을까 잠시 고민도 했다. "이왕이면 이른 생일이 좋으려나?" 하는 나의 질문에 신랑은 "에이 그런 건 상관없어." 깔깔 거리며 대화를 나눴다.


통상적으로 부부가 피임 없이 성관계를 갖는 경우 1년 안에 임신이 될 확률은 80~90%라고 한다. 1년이 지나면 난임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안내한다. 우리에게도 기대로 가득 찼던 1년이 지났다. 그러나 이미 산전 검사를 해봤고 특별한 소견이 없었으니 난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우리에겐 '바쁜 현대인'이라는 누가 듣기에도 그럴듯한 핑계가 있었다. 그도 나도 늘 일에 치였고, 한 달의 한번 우리의 중요한 의식을 가지기 어려울 때가 있었으며, 번갈아 출장을 가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가 정해둔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니 초조해졌다. 임신 테스터를 더 이상 쿨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임신 테스트를 하고 나면 테스터기를 요리 살펴보고 조리 살펴봤다. 아무리 봐도 단호박 한 줄. 연한 선 조차 보이질 않는다. 무조건 한 줄이다. 너무 한 줄만 나와서 테스터기가 고장 난 건 아닌가 잠시 생각도 해봤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말처럼 불도저마냥 노력했다. 보양식 챙겨 먹기. 몸 따뜻하게 하기. 한의원 가기. 병원 가서 날짜 잡아오기. 인터넷에 떠도는 비법 찾아보기. 드디어 아이를 맞이할 준비가 어느 정도 된 것 같은데,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을 하는데 왜 아이는 안 오지? 그게 언제든 임신 하기에 '완벽'한 때는 없었다. 아이를 데려다주는 버스가 이미 떠나버린 것은 아닌지 점차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난임 시절 가졌던 가장 큰 죄책감은 바로 이 부분에서 비롯되었다. 우선순위 싸움에서 밀려서 계속 임신을 미루던 것 말이다. 당연히 부모가 될 준비를 하고 아이를 맞이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한편 나의 욕심 때문에 아이가 오려던 시기에 못 온 것은 아닐지... 혹시 신이 노하셔서 아기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닐지 매일 자책했다.


임신 소식을 기다리는 가족들에게도 미안했고 누가 아이 소식을 물을 때마다 초조해졌다. 남편은 우리가 피곤해서 그럴 거라며, 정 안되면 쉬면 될 거라고 여유 있게 다독여주었지만, 임테기 한 줄의 슬픔을 달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부부의 일이지만 임신 확인이 여성의 몸에서 가능한 만큼 같은 일에도 내가 10배 정도 더 부담을 느끼는 듯했다. 돌이켜보니 나는 세상이 '정해놓은 타이밍'이라는 것에 너무나 예민했다. 인생의 타이밍이 내 뜻대로 딱딱 맞게 흘러가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적절한 시기에 남편을 만났고 결혼도 했으니 아이도 그럴 거라 믿었나 보다.    


정말 이제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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