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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롱 Aug 27. 2021

의외로 용기가 필요한 일

난임 전문 병원 다니기

병원 선택은 어려웠다. 아이가 잘 생기지 않는 것이 속상해서 늘 쉬쉬했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떤 의사가 좋은지 주위에 물어볼 수도 없었다. 모든 정보는 전적으로 인터넷에 의지했고 환자 개개인의 속 깊은 사정을 모르는 만큼 같은 선생님에 대한 평도 다양했다.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 같아서 아무나에게나 갈 수 없었고, 이왕이면 유명하다는 분께 가면 한방에 해결될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유명세에는 기나긴 진료 대기 시간이 따랐고, 심지어 독설가로 유명한 분도 계셨다. 직장인으로 난임 시술까지 해보겠다는 나에게 그런 병원에 가는 것은 지나친 욕심 같았다. 그때부터 인터넷 중독에 빠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의 난임 일기와 극복 후기를 읽으며 울고 웃기를 반복하는 일상. 난임 카페에 올라오는 거의 모든 글을 읽었고 궁금한 점이 생기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찾아봤다. 어느 카페의 상단에 있던 '불임은 없고 난임은 있다'는 말이 마음 구석에 한결 위로가 되었다. 내 코가 석자지만 심지어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이를 꼭 낳아야 한다고 모두가 믿던 시절에 지금처럼 의료기술이 발달했다면 어떤 분들은 엄마가 되었을 텐데, 아이 갖지 못하는 설움에 그렇게 그렇게 밤에 울지 않았을 텐데.


처음에는 일반 산부인과를 갔다. 집 근처의 산부인과는 크지 않아도 깨끗했고, 접수를 하고 대기실에 앉아있으면 옹기종기  쪼르르 앉은 배불뚝이 임산부 무리를 볼 수 있었다. 그 광경이 무척이나 평화롭고 예뻐 보였던 덕에 산부인과에 가는 일이 싫지 않았다. 물론 불편함도 있었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단순히 상담하는 날도 있었지만, 산부인과 진료의자에 앉아 검사를 받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 의자에는 '굴욕 의자'라는 별명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의와 속옷을 탈의한 채 치렁치렁 옆트임이 끝까지 되어있는 지나치게 민망한 치마를 입어야 하고 다리를 잔뜩 벌리고 앉아야 하니까 말이다. 존재감이 큰 그곳에 앉으면 나도 모르게 수치심에 속이 울렁울렁 거리기도 했다. 치과에 가면 입을 벌려 이를 보여주는 것이 당연하고, 안과에 가면 눈을 크게 뜨고 동공이 잘 보이도록 기구 안을 응시 해야 하는 법인데, 이상하게 산부인과에서 진찰받는 일은 몇 번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질 초음파는 통통한 막대기 모양으로 생겼다. 위생을 위해 고무를 끼우고 카메라를 몸속으로 훅 집어넣는다. 자궁도 보고 난소도 보고 배란이 잘 되었는지 확인도 한다. 이것 봐. 글로 쓰는 것조차 왠지 모를 민망함에 낯 뜨겁다.


산부인과에서 기본적인 검사를 진행했다. 산전 검사는 남자도 여자도 받는데 양쪽이 다르겠지만, 보통 여성은 혈액 검사, 질염, 자궁암, 톡소플라스마 항체, 성병 관련, 갑상선, 유전자, B형 간염, 풍진 항체 여부, 난소 나이 등을 확인한다. 추천해주는 대로 검사를 다 받았다. 임신 전에 항체가 생성되어야 한다며 급하게 풍진 접종과 B형 간염 예방 주사도 맞았다. 시키는 대로 하니 어려운 것은 없었지만 병원에 한번 다녀오면 진찰비는 한두 푼이 아니었다. 그래도 임신이 앞당겨진다면 기다림의 괴로움은 덜할 거라는 생각으로 지시에 따랐다. 나름 모범적으로 모든 것을 따라도 기다리던 아기는 오지 않았다. 담당 의사는 늘 웃으며 긍정적인 이야기만 해주셨다. 나이도 많지 않고 몸도 건강하니 열심히 시도하면 될 거라는 말을 매번 했다. 그것도 몇 번이 지났고 임신으로 이어지지 않자 서로 민망한 얼굴로 마주하게 되었다. 질문도 조언도 없이 후다닥 진료 시간이 끝나 버리고는 했다.


난임 전문 병원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긴 알았다. 그래도 특별히 그곳을 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산전 검사에서 괜찮았으니 그냥 자연 임신을 시도해도 될 거라고 믿으며 흘러간 시간은 1년 남짓. 난임 병원으로의 문턱을 넘는 일은 단순하지 않았다. 임신이 안되네? 이상하네? 물어보자 라는 단순한 진료가 아니라, 내게 문제가 있다고 받아들이는 일로 여겨졌기에. 진짜 환자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 정말 임신이 안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스며드는 것 같았다. 게다가 시험관 시술에 대해 찾아보면 온통 아프고 힘든 이야기로 가득 차 있어서 쉽게 엄두가 안 났다. 난임 병원을 찾아가는 일에는 용기도 계기도 조금 더 필요했다.


남편 주위에는 이미 시술로 아기를 얻게 된 친구들이 있었다. 덕분에 남편은 시험관 시술의 어려움을 나보다는 조금 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본인보다 아내에게 조금 더 신체적인 무리가 간다는 이유로 쉽게 병원에 가보자고 말도 꺼내기 어려운 눈치였다. 둘 다 퇴근이 늦고, 회사에 양해를 구하는 것이 힘들다는 이유로 병원의 문턱을 넘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신랑과 나, 늘 마음이 불편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더 마음 졸이며 괴로워하셨던 것은 우리 엄마였다. 아이 셋을 낳아 기르신 우리 엄마. 우리의 결혼 햇수가 지날수록 가정을 꾸리면 얼른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한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지신 우리 엄마는 애가 타셨다. 전화만 하면 아이를 언제 낳냐는 성화에 사근사근한 대답보다 나도 모르게 거친 반응이 나왔다. 시부모님은 아무 말씀 없이 기다려주셨지만, 괜히 마음이 콩닥콩닥 내가 더 눈치가 보였다.


또 한 해가 지났다. 아기가 찾아온 줄로 알았지만 계류 유산으로 보내고 나니 마음이 갑자기 조급해졌다. 유산의 슬픔은 출산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떠도는 소문을 그대로 믿었고 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얼른 임신하고 싶었다. 아이를 기다리는 마음이 곱절이나 간절해졌달까. 여전히 슬픈 나와 남편. 돌파구가 필요했고 나는 어느 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갈래. 난임 병원. 시험관 시술할 거야. "

"괜찮겠어...?"

"남들도 다 잘 한대, 괜찮아."


남편은 회사에 다니며 난임 병원까지 가는 것이 괜찮을지 걱정했다. 휴직부터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나는 실패가 두려워 임신 준비에 올인하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겪어보지 않은 일이니 회사를 쉬는 건 우선 병행해보고 나서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병원에 선택 전에 나름 기준을 세웠다. 집과 회사와 가까울 것. 아침 진료가 있어 출근 전에 갈 수 있을 것. 무섭고 차가운 소문보다는 조금 더 따뜻한 후기가 있는 곳으로. 인터넷 카페에서 정보를 샅샅이 보며 나름 생각했던 면에 만족하는 병원을 찾았다. 인자해 보이시는 선생님도 선택했다. 어려울까? 아플까? 직장생활과 병행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금세 접고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병원은 대학병원만큼 대기도 길지 않았고, 출근 전에 진찰을 받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동안 다녔던 병원보다 더 심각한 분위기 일 거라고 예상했던 난임 병원은 일반 산부인과와 다름없었다. 한국 시험관 기술이 뛰어나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정말로 종종 외국인을 보는 일도 있었다. 조곤 조곤 들리는 영어와 러시아어. 어느 나라 언어인지 잘 알아듣지 못해도 머리와 몸을 가린 이국적인 차도르를 입은 분들을 보면 해외에서도 원정 시험관 시술을 위해 한국에 방문하는 것 같았다. 국적에 상관없이 아이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은 하나다. 힐끗 한번 보고 애써 신경을 핸드폰으로 돌렸지만 나도 모를 동질감이 느껴져 마음속으로는 절로 응원을 보냈다. 이 공간에 있는 우리 모두 소원을 이룰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잠시, 드디어 선생님을 처음으로 만났다. 아버지보다 살짝 젊어 보이시는 나의 선생님. 큰 키에 마른 체구에 안경을 끼셨다. 문진표를 이미 작성했기에 그동안 가져온 마음고생까지 꿰뚫어 보시는 듯했다. 잘 왔다고 환영해 주셨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


라는 선생님 말씀에 나도 모르게 다시 희망의 기운이 감도는듯했다. 난임 병원으로 마음 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막상 난임 병원에 다니기 시작하니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졌다. 임신의 가능성이 높아져서였을까? 이곳에서는 꼭 아기를 만날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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