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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롱 Aug 10. 2020

그 시절 하숙집 이야기

따뜻한 집주인 아줌마의 인정

벌써 십수 년 전의 일인데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때의 삶이 나에겐 꽤나 강렬한 자극 같은 것이었나 보다. 나는 아일랜드로 대학 진학을 했다. 그때의 나는 어려서 그랬나 준비성이 약간 부족했다. 미리 조사를 다 마치고 시작하는게 아니라 뭐든 직접 부딪혀서 해결하는 편이었고 새로운 국가 새로운 도시에서 맞이하는 첫날 숙소조차 예약을 안 하고 갔으니 겁이 없었던듯. 어쨌든 내가 다닐 대학 근처의 호텔 이름 하나 알아두고 그 먼길을 갔다. 아일랜드 더블린 공항에 도착하고 내 짐이 경유지인 파리에서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짐이 안 온 것도 안온 것이지만..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기가 어려워서 더 당황했던 기억. 같은 영어인데 왜 그리도 다르게 들렸는지.


그리고 또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아일랜드의 서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 골웨이. 급한 대로 택시를 타고 미리 알아둔 호텔로 안내해달라고 한다. 택시 아저씨는 어려 보이는 내가 왜 굳이 그 비싼 호텔로 가려고 하는지 되물으시며 근처의 B&B를 소개해주셨다. 주인 아주머니도 따뜻하고 깨끗하고 더 저렴하다고 하시면서, 가보고 원하지 않으면 호텔에 다시 가도 된다고 그러시면서. 택시 아저씨는 호텔 근처 B&B 앞에 날 내려주시고 떠나셨고 나는 초인종을 누르고 예약 안 했는데 머물 수 있을지 물어보고 B&B 생활을 시작했다. 아 학생이라고 숙박비를 할인해달라는 요청도 잊지 않았는데, 다정한 그 집 여주인은 지금이라면 이상할 이런 요구 조차 흔쾌히 들어주셨다.


나는 그곳 다락방의 트윈룸에서 머물렀고, 시차 적응에 실패해서 5시 새벽 기상을 하곤 했으며, 아침 식사는 주는 대로 Irish Full Breakfast를 먹었다. 배가 하루 종일 부른 것 같은 그 식사는 참 다행이었다. 아일랜드 물가는 정말 터무니없이 비쌌고 샌드위치와 음료를 만 몇천 원씩 주고 사 먹기엔 내 주머니가 작았던 그 시절이라 샌드위치를 사서 점심때 반만 먹고 남은 것으로 저녁을 때우곤 했다. 그런 시기에 푸짐한 아침 식사라니. 고맙기 그지없는 아침이었다.


매일 숙박비를 내며 이대로 계속 이곳에서 지낼 수는 없었다. 얼른 학교에 가서 내가 살 수 있는 곳을 물어봤다. 기숙사는 이미 마감이라며 하숙집을 한 곳 소개해주었다. 바로 아일랜드 토박이 롤다 아줌마의 집. 한국인은커녕 중국인이나 다른 동양 사람도 잘 찾아보기 힘들었던 지구 반대편 학교. 롤다 아줌마를 소개해준 이유는 간단했다. 그 집의 셋째 아들 아내가 중국인이라나? 그래서 아일랜드 적응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전화를 하시더니 아줌마가 바로 데리러 오셨다. 일사천리로 하숙집을 정할 수 있어 B&B 생활은 삼일 만에 청산했다.


집은 나름 저택이라 부를 만큼 크고 좋았다. 그 하숙집에 나만 세 들어 사는 것은 아니고 페루인도, 멕시칸도, 캐리비안의 세인트 빈센트라는 나라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캐리비안에 그렇게 나라가 많은 줄도 몰랐고 그곳 사람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지도 몰랐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였으니 종종 저녁에 모여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고 주인아주머니는 아일랜드 문화를 알아야 한다며 독주를 주시곤 했다. 독주라고 하기엔 너무 달콤한 Baileys에 커다란 얼음을 하나 동동 띄워주셨다.


아줌마는 유쾌했다. 얼굴을 보면 믿을 수 없지만 60대이고 손녀도 있으시니 할머니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곤 하셨다. 이미 장성한 아이가 넷이고 아저씨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이 큰집에서 혼자 사는 게 외로웠다고 하셨다. 그래서 학생들을 집에 맞이 하기 시작하셨다고. 늘 새로운 사람들을 집에 맞이 하셔서 그런지 늘 따뜻했고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셨으며 술이든 먹을 것이든 늘 뭐든 주려고 하셨다. (하숙이지만 자취에 가깝게 식사는 스스로 챙겨 먹어야 한다) 학생들은 1층에 살고 아줌마는 2층에 사셔서 공간 구분은 잘 되었던 것 같다.


금요일이 되면 아줌마는 변신을 하고 내려오셨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들과 펍에 가는 것이 주말 행사였던 것 같다. 근사 하게 차려 입고 평소 얇고 축 쳐져 있는 금발에 한 껏 컬을 주고. 부엌에 서서 화이트 와인 한잔을 마시며 한껏 상기된 얼굴로 택시가 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나름 즐거운 인생을 보내고 계셔서 그런지 아줌마는 영 집 밖을 나가는 일이 없는 나를 걱정하셨다. 걱정의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종종 저녁에 모두 모이며 난 별로 말하지 못하고 조용히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 었기 때문.


지금 스페인에 사니 더 이해가 되는 부분은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이 말이 상당히 많다. (이쪽 언어는 텍스트 메시지도 아주 길게 쓰는 편이고 그게 예의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늘 낄 틈이 없기도 했거니와 어떤 얘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나는 늘 내 앞의 접시와 잔을 비우며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물론 1:1로 대화할 때는 내 이야기도 하고 농담도 주고받고 그랬는데 이상하게 많은 사람이 있으면 주눅 들었고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 말을 해야 할지 타이밍 잡기도 힘들었던 것 같다.


아줌마가 안 되겠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내가 계속 이렇게 살면 여기서 적응 못할거라 생각하셨나 보다. 아줌마는 어느 날 저녁부터 사람들 있는 곳에서 나에게 말을 시키기로 작정하신 듯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말하기. 그것도 연습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곳에서 그냥 나는 조용한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줌마는 나에게 새로운 스킬을 길러주기 시작하셨던 것 같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아줌마는 왜 그때 네가 말했던 거 있잖아라며 운을 떼셨고 나는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 떠올리며 그 얘기를 꾸역꾸역 마쳤던 것 같다. 아줌마가 시킨 숙제 끝내기 처럼.


지금 생각하면 롤다 아줌마께 너무 감사하다. 그때의 엄마 같은 그 정성이 없었다면 지금도 역시 어려움 없이 다수 사람에게 말하기가 여전히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물론 세월의 내공도 한몫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어려움이 전혀 없다. 디너에 초대받거나 티타임이나 혹은 회사에서 팀 대표로 뭔가를 발표한다거나 그런 걸 즐겨하는 편이니 아줌마의 트레이닝은 나에게 정말 효과 적이었던 것 같다. 한편 그때 그 시절 왜 그렇게 내 인생에 스토리가 없었나 싶기도 하다.


마드리드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비 냄새를 맡으니 아일랜드가 생각났다. 다정하게 기다려 주고 기회를 만들어주었던 그 아줌마. 여전히 잘 지내고 계시려나? 궁금해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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