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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롱 Sep 02. 2020

아빠가 사주신 양말

나도 엄마가 되고 보니 이제야 알게 되는

오늘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잠이 쉽사리 오지 않는 밤이면 괜히 이런저런 생각도 나고 그러면 괜히 글도 쓰고 싶다. 스페인어 시험을 앞두고 있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공부를 해야 하는데 공부보단 이렇게 자유로운 시간이 좋은 것을 어쩐담. 왜 갑자기 양말이 생각났나 생각의 흐름은 대강 이랬던 것 같다. 자주 가는 스페인 관련 인터넷 카페에 출산 용품을 팔고 싶다는 글이 올라왔다. 그러면서 나도 우리 집에 쌓여있는 출산, 육아 용품이 생각났다. 쌍둥이네 집이라 워낙 육아용품이 많기도 하지만 둘이 쓰니 늘 사용감이 많아 되팔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출산 용품은 일부 사용감이 없는 것들이 있다. 수술로 출산을 해서 산후용 방석도 거의 쓰지 않았고 가제 수건도 너무 많이 샀는지 아직도 새것이 조금 남아 있다. 그리고 아직도 새것인 채로 남아 있는 것은 압박 양말? 아기를 낳고 나면 몸이 부어서 코끼리 다리처럼 된다는 얘기에 깜짝 놀라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오시는 엄마 편에 부탁을 드렸었다.


엄마편에 가져와 달라고 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정말 이민가방 하나 수준으로 짐을 가져다주셨다. 다른 것들은 내가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되는데 압박 양말? 은 도저히 감이 안와 사주십사 부탁을 드렸는데, 아빠가 사다주셨다. 무려 약국도 아니고 의료 재활 기구 전문점에 가서 제일 좋은 걸로 사주셨다. 신을 일이 없어 다행이긴 했으나 그 비싸다는 양말을 한 번도 못 신은 것이 못내 죄송스러워서 집에서 시착은 해보았다. 짱짱하게 좋은 것이군! 그렇지만 다리 붓기에 아무 이상이 없는 내가 신기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난 다리는 안 부었지만 얼굴이 마구 부었다. 원래 얼굴이 동그란 편인데 아주 퉁퉁한 얼굴이 되어 볼 때마다 속상했다.) 어쨌든 갑자기 생각난 그 양말. 어디에 두었을까. 내가 계속 가지고 있을까?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 주더라도 꼭 가까운 사람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아빠는 늘 좋은 걸 사주셨던것 같다. 고등학교 음악 시간 준비물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때 필요했던 것이 단소. 한국 전통 악기, 쉽게 말하면 피리. 어느 때가 안 그랬겠냐만 정신없는 시기라 또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아버지께 사주십사 부탁을 드렸다. 인터넷 검색도 익숙하지 않은 시기에 어떻게 찾으셨는지는 의문이지만 시내 악기사에서 근사한 단소를 사다 주셨다. 희끄므리한 대나무 단소도 아니었고, 흰색 플라스틱 단소는 더더욱 아니었다. 악기는 검은빛이 도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흑단 단소라고 하셨다. 그땐 내가 어렸는지 그냥 내 단소가 좋아 보여서 좋았다. 아빠가 정성으로 사다주신 그 과정은 잘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뭘 사줄까 고민하고 이왕이면 좋은 것을 사주려고 하셨던 그 마음. 내가 좋아하려나 설레는 마음으로 하는 쇼핑.


아빠는 늘 같은 구두를 신고 벨트가 끊어질 때까지 쓰시는 분이셨다. 새 벨트를 선물 받아도 쓰던 것이 편하다고 허허허 하시면서 선물 박스 그대로 장에 넣어두시곤 했다. 철마다 새 옷을 사긴 커녕 아직도 몇십 년 된 아이템들이 있다. 아빠의 편안한 쇼핑 리스트는 면백수의 새하얀 반팔 러닝과 때마다 필요한 양말 정도랄까. 하지만 아내와 자식들에겐 아껴 쓰란 잔소리 한번 없이 늘 좋은 걸 사주려고 하시는 아빠. 이런 게 부성애인 것 같은데, 정작 아버지는 아버지 없이 자라셨는데 어떻게 한결 같이 베풀어주실까.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쉬운 것이 아니더라. 아이에게 당연히 좋은 것 해주고 싶은데, 내 것도 자꾸 눈에 들어오는 것을 어쩌나. 나는 조금 더 철이 들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지금의 아빠가 이전보다는 조금 더 자유롭게 살고 계신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하다. 얼른 아기들 데리고 한국에 가서 얼른 아빠에게 가고 싶다. 정성껏 키워주신 딸, 이젠 제가 아이들을 정성껏 키우겠습니다. 다짐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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