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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summer Dec 30. 2020

12월 31일은 힘이 없다

얄팍한 하루

오랜만에 다이어리를 펼쳤다. 작년 말즈 음부터 심취해 있던 '기록'이란 테마를 올해도 이어가기 위해 야심 차게 준비했던 두꺼운 몰스킨 데일리 다이어리였다. 책장에 가득 꽂혀있지만 옆면이 정말 쭈글쭈글한 다이어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증명해주듯이 언제나 그렇듯, 나의 2020년 다이어리 역시 홀쭉했다. (종이에 글을 열심히 적다 보면 그 종이들은 차곡차곡 쌓여 뚱뚱해진다)

출산 전까지 매일매일 글씨도 아주 예쁘게, 먼슬리 플랜도 빼곡하게 채웠던 몇 장을 넘기고 나니 조금씩 듬성듬성 해져있던 나의 기록들. 육아가 너무 힘들어서, 쓸 게 없어서, 쓰는 것을 까먹어서, 어쩌다 보니, 유튜브를 보며 잠드느라 등등 내가 꾸준히 기록을 남기지 못한 이유들은 많았다. 뒤로 갈수록, 글씨는 더 개판이었고 의무감에 억지로 쓴 장들도 있었고, 책을 읽다가 감명받은 글귀들을 옮겨 적으며 하루를 땜빵(?)한 장도 있었다.


얄팍한 한 장의 하루


그렇게 다이어리 주르륵 펼치다가 오늘에 이르렀는데, 옆에 보이는 12월 31일. 단 한 장의 무게가 이리도 가벼웠다니. 책상에 놓고 보니 더 팔락거렸다. 힘없이 비쩍 마른 노인의 뒷모습을 연상케 했다.

그 두텁고 두터운 1년의 초중반의 나날들은 텅텅 비워놓고 이제 와서 그 장을 메꾸자니 그것 또한 머쓱한 기분이었다. 12월 30일은 비어있으나 그나마 그동안의 나날들이 받쳐주어 덜 쓸쓸했지만 12월 31일의 뒤는 딱딱한 뒤표지뿐이었다.


12 31일은 힘이 없다.


앞으로 수십 년은 살 텐데 '그중의 한 날일 뿐인데 열심히 살면 돼지!'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와 같은 콘텍스트들을 티브이에서 많이도 접했는데, 내가 마주한 나의 일기장에 남은 12월 31일은 무기력했다. 1년을 12달로 나누고 사람들은 어쨌든 연말연시라는 이름으로 들뜨기도 하고 쓸쓸해하기도 하며 한해를 뒤돌아보며 마지막 의식은 치르니까- 인생의 한 부분에 구분을 짓고, 종지부를 찍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힘을 받기도 한다. 왠지 그날엔 모든 것이 용서될 것 같고, 특별할 것 같다. 그제야 '내년부턴 열심히 살겠다!'는 마법의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정말 그날만큼은 잘 마무리 짓기 위해 불필요한 노이즈들을 최소한으로 하며 마음도 넉넉하게 쓰는 날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12월 31일, 딱 그 하루의 장(章)은 힘 없이 펄럭인다. 막판에 만회하려 하지 말고 나날들을 차곡차곡 정성을 다해 쌓아올려야한다.

그 장을 마주 하기 위해 지나쳐온 수많은 장들을 대충 살아서는 내 인생 중의 한 권을 제대로 채울 수 없고 마지막 장만 뜨겁게 기록을 남긴다고 해서 내 다이어리가 볼품 있어지지도 않을 일이었다. 올 한 해 열심히 살았음을 믿어 의심치 않겠지만, 마지막이 아름다우려면 잘 빚어낸 과정(evidence)이 뒷받침돼야 할 듯하다.



12월 31일은 힘이 없다.

갑자기 펜 하나 잡고 책상 앞에 앉는다고 당장 새해의 빅픽쳐를 그릴 수 없다. 지나쳐온 나날들의 작고 큰 부침들에 흔들리지 않은 기록들이 있어야 가능하다. 사진의 기록과는 또 다른 힘이, 다이어리에 꾹꾹 눌러 내려적은 페이지들에 분명히 있다.


일기가 되었든 단상이 되었든 기록할 것. 내가 왜 기록을 하려 하는지 떠올리고 내가 어디서 어떻게 변하고 성장했는지 1월-12월 매일 그 순간들을 희미한 기억으로 놓치지 말고 기록으로 남길 것.

「2020년 12월 30일 현재 나의 새해 목표1_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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