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 귀퉁이에서 갑자기 재난영화 한 컷.

해리포터 어머님께 빙의했던 어느 날.

by 여름의summer

일본은 자연재해, 그중에서도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나라이다 보니 매년 정기적으로 각 기관, 조직 내에서 방재훈련이란 것을 한다. 우리 회사 같은 경우도 일 년에 2-3번 정도 했던 것 같은데 사이렌이 울리면서 '대피하라!'는 전혀 위급하게 느껴지지 않는 어나운스를 반복하며 사내외에 있는 임직원들과 그 가족들까지 안전한지 메일을 보내 의무적으로 회신을 해야하고 집계하는 시스템이었다. 사실 일본으로 가게 된 건 3.11 대지진 이후인 데다가 어릴 때부터 항상 피난훈련・교육을 받는 일본인들과 달리 지식도 경험도 없는 나는 자연재해에 대비하는 마음가짐이 전혀 안되어있었다. 게다가 회사에서 하는 방재훈련은... 그냥 시뮬레이션을 위한 시뮬레이션이었을 뿐. '대피하라!'는 경비아저씨의 일본어와 어색한 영어 어나운스의 반복을 ASMR 듣듯 귓등으로 흘리면서 모두가 평소처럼 바쁜 업무에 몰두하며 지나가는 그저 조금은 시끄러운 시간일 뿐이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에바를 데리고 방문한 보육원 히로바*

*히로바: 한국어로 직역하면 '광장' 이란 뜻. 한국의 구립 아동센터나 키즈카페 같은 곳인데 일본 해당 지자체에 거주하는 아이 있는 부모들을 위해 개방해놓은 무료 실내 놀이방. 한국처럼 아이를 맡기는 것이 아닌 엄마가 항상 옆에 붙어있어야 한다. 주로 보육교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분들이 엄마들의 부담과 스트레스를 덜어주기 위해 돌아가며 아이와 놀아주기도 하고 엄마들과 대화를 해주신다. 대부분 한국 시설에 비해 낙후하고 장난감이 많지만 일본 특유의 관리체계로 오래된 시설이라도 상당히 깔끔하고 깨끗하다. (최근에는 코로나로 인해 일주일에 1번 1시간 정도의 예약제로 이용 가능하며 하루에 2타임 3-4팀을 수용하며 운영중.)


선생님께서 오늘 11시부터 방재훈련이 있을 거란다. "평소 같았으면 어머님들 헬멧 다 쓰고 실제로 아이 데리고 정원으로 나가고 제대로 시뮬레이션받아야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약식으로 하기로 했어요"라며 그냥 "요 안에 계세요" 라고.

넣을줄은 모르고 꺼낼줄만 아는 녀석


그냥 또 사이렌 울리고 안내방송 나오겠구나 싶어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는데 시간이 되었고, 방구석 그림책 코너에서 모든 책을 다 꺼내보고 있던 우리에게 선생님이 상냥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그곳에 계시면 안 돼요. 천장에 선풍기도 있고 주변에 책장도 있으니 떨어질 게 많잖아요. 얼른 이리 가운데로 오세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니 웬걸, 다른 엄마들은 두 팀 정도 있었는데 다 아이를 안고 각자 나름의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머쓱해진 나는 서둘러 에바를 안고 지진이 나도 덜 위험할 것 같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선생님이 계속해서 지시를 내린다. (나중에나 안 사실이지만, 일본 내의 모든 공기관/사기관을 통틀어 가장 피난훈련을 철저히 하고 있는 곳이 보육원=어린이집 이란다. 그래서 워킹맘들은 지진이 날 경우 일단 보육원을 믿고 자신의 안전부터 챙기라고 하는 기사도 봤다. )


"원래 각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야 하지만 어머니들은 아이를 안고 두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감싸고 공벌레처럼 웅크려 숙이세요! 온몸으로 아이를 돌돌말아 덮어주세요"


'아. ㅇ_ㅇ 이거슨 리얼이다.'


웃음기가 사라진 나는 그제서야 엉거주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에바를 꼭 감싸 온전히 내 몸으로 품었다. 정체불명의 위급한 사이렌 소리는 울려 퍼지고 잘 놀다가 당한 결박(?)을 달가워 할리 없는 딸아이는 온몸으로 나를 거부했다. 바닥에 내 이마를 박고 딸아이를 온몸으로 감싸고 있는데 갑자기 울컥했다. 나의 머리와 몸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상황에서 딸아이의 버둥거리는 몸 위에 엎드려 있자니 묘하게 심장이 쿵쾅대고 몹쓸 상상력이 가동하며 지금이라도 땅이 흔들리고, 건물이 흔들려서, 천장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내 위에서 뭐가 떨어져 어깨죽지가 박살이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이는 답답해서 울고 있는데 내 사지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엄마가 온몸으로 막아 낼게. 너에게 조금의 돌 부스러기도 해가 되지 않도록,
볼드모트로부터 해리를 지킨 릴리 포터처럼 너만은 살릴게.
무너진 건물에서 너는 살아 나갈 수 있도록 엄마가 지켜줄게.


비록 '가상의 훈련'중이기는 했으나 그 짧은 5분여간 혼자 재난영화 한 편을 찍고 있었다. 10여년 가까이 산 이 나라에서 생존하기 위한 나의 진정한(?) 훈련은 그렇게 도쿄의 한 어린이집에서 이루어졌고, 나는 땅이 무너지고 하늘이 솟아나도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엄마가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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