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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summer Nov 30. 2021

나만의 공간

kitchen

옛날에 우리네 엄마들은 널찍한 거실을 두고도 왜 그렇게 주방에 집착했을까 싶었다. 손님이 올 때도 다과나 음식을 내올 때 들락거리는 용도 외에도 가끔은 손님과 주방 바닥에 앉아 담소도 나누더랬다. 아이들은 거실에서 뛰놀게 하고 '분리'된 공간에서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고 싶었던 걸까. 심지어 간단한 요기는 주방에 선채로 하는 엄마들을 보며 '왜 저렇게 불쌍하게 부엌한켠에서 저러고 있을까?' 했었는데. 한 때 유행하는 '키친드링커'라는 말도 있듯 나 역시 맥주 한 캔 따서 소파에 편안히 앉기보다는 주방에서 지지고 볶는 동안 잠시 한 모금의 여유를 가질 때가 더 많다.




개인의 공간도 아니고 누구나가 들락거릴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이지만, 나 역시 결혼하고 아이를 갖게 되며 이상하리만치 주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처음엔 단순히 끼니를 준비하고 치우는 공간이었고, 깔끔한 성격의 남편 조차 이상하게도 싱크 주변같이 물이 있는 곳의 정리정돈은 잘 못했기에 그곳만큼은 내 손으로 다 해내고 난 뒤 깨끗해진 주방을 보며 카타르시스마저 느꼈던 것 같다. 이제는 어디에 쇼핑을 가도 내 옷이나 화장품을 사는 데는 관심도, 소질도 없고 주방을 채우는 기구, 식자재 등을 사는 데에는 도가 터서 소소한 기쁨이 되었다.


요즘, 아니 오래전부터 늘 하던 고민들 -나는 누구이고 누구였으며,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왜 사는지- 어떨 땐 아파서 병원에 가도 내가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 모르겠다는 것에 당혹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뻔한 말이지만 아이가 태어난 후 내 딸이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공간, 환경, 물건, 음식 등등 모든 우선순위를 아이에게 맞추다 보니 내 취향 따위 기억날 리 없다. 이건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고, 성격상 이렇게 된 '상황'이 전혀 싫지는 않지만, 자꾸 내가 나를 모르겠다는 '고민'은 불쑥불쑥 튀어나와 잘 살고 있(어야하)는 나를 괴롭힌다. 그런데 아마도 그건, 나만의 공간이 없어졌던 것에 그 답이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심리적인 우선순위가 아이에게 맞춰져있는 상황에서 물리적인 공간마져 없어졌으니 집안에서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요즘, 나를 잃지 않는 것이 더 어려워진 것 같다. 일본집치고는 드문 형태의 널찍한 거실 하나와 방한칸이 전부인 우리 신혼집에서, 아이는 거실과 방을 종횡무진하고 있고 심지어 잠자리마저  아이공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리가 온전히 있을  만무하다.


결혼 전부터 결혼을 하게 되고 가족을 갖게 되면 거실을 아늑하고 편안한 '가족 모두의 공간'으로 꾸미는 게 꿈이었는데, 좁은 일본집의 특성을 잘 살려 쉼의 공간뿐 아니라 가족의 생산성이 향상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테이블을 고르는 것에 가장 고민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남편이 재택을 하고, 내가 책을 읽거나 작업을 하고, 내 아이가 밥을 먹고 그런 엄마 아빠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의 꿈도 그려보는.

어떻게 보면 '팀워크'가 도모되는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결국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듯, 집안에서 소모된 나의 에너지에 온전히 집중하고 채울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남편의 손과 내 아이의 호기심이 덜한 공간- 키친에서 어떤 식으로든 '작업'을 완수하면서 내가 나로 있으려고 했던 것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우리 남편은 변비도 아닌데 화장실에 한 번 들어가면 30분은 함흥차사다.


한창 육아로 찌들어 히스테릭할 때에는 딸아이와 놀아주는 것이 힘들어 궁여지책으로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화장실에 갔다는 사람한테 나오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런데 설사 그렇다 한들 어떠하고 변비면 어떠하리. 남편도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고 쉬이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도 그만의 공간을 찾아 중간중간 숨 돌릴 곳이 필요했다. 그마저 나보다 좁은 한 뼘도 안 되는 공간에서 혼자 쭈그리고 앉아 심신의 안정을 도모했을 남편이 짠하다. 엄마이지만 희미해져 가는 '나'를 부여잡기 위해, 아빠이지만 분명히 어딘가 존재했던 '나'를 찾기 위해, 남편과 나는 오늘도 각자의 공간에서 애쓰고 있다.



                                                                                                     (photo:  @mari_ppe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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