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 축제 기간이면 괜히 가파도에 한 번 가 보고 싶어진다. 작년에도 둘째 소풍 갔다 온 이야기를 듣고 너무 가고 싶어져 남편이랑 다녀왔다. 좀 늦게 갔더니 청보리가 다 익어서 황금 보리가 되어있었다. 청보리도 황금 보리도 다 좋기는 하다. 올해는 좀 서둘렀다. 축제 기간이라 사람이 많긴 했지만 배도 금방 탈 수 있었다. 다만, 1시 반 배를 타고 가는데 돌아오는 배는 5시 10분 배밖에 없었다. 얼른 가고 얼른 와야 하는 엉덩이 가벼운 남편 때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속으로 좋았다. 남편은 카페를 가도 30분, 아무리 멋진 곳을 가도 사진 몇 번 찍으면 가자고 한다. 가파도도 한 바퀴 돌고 파전 한 번 먹으면 와야 한다. 오늘은 제대로 놀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신났다.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돌았다. 작년에는 좀 힘들었는데, 이날은 날씨도 딱 좋고 별로 힘들지 않았다. 나는 자전거를 못 타서 2인용 자전거를 탔다. 남편이 운전하는 자전거 뒷자리에 앉으니 괜히 든든하고 기분이 좋았다. 남편이 열심히 밟으라고 잔소리했지만 그것마저 재밌었다. 뒷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사진도 찍어봤다. 남편이 한 번씩 사진 잘 찍고 있는지 확인도 한다. 내가 블로그를 시작한 다음부터 남편은 종종 사진을 찍어서 주기도 하고 내가 놓치고 있는 것 같으면 슬쩍 알려주기도 한다. 한 번씩 자기 이야기도 나오는 내 블로그를 재밌어하는 것 같다.
예전에 아이들과 함께 왔던 기억이 났다.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더운 날씨에 걸어 다니느라 아이들이 짜증 부렸었다. 준비를 잘 못하는 엄마가 어린아이들 데리고 다니며 물도 안 챙기고 가서 고생했다. 그 당시 몇 집 없었던 겨우 찾아간 맛집은 마감 시간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아이들에게는 별로 좋은 기억을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다. 그래도 한 번씩 가파도를 이야기할 땐 그날을 떠올리며 웃는다. 추억이 남았다.
한 바퀴 다 돌아도 20분. 세 시간이나 남았다. 이번엔 자전거 반납하고 슬슬 걸었다. 작년에 파전에 막걸리 먹었던 집 앞에서 멈춰 보기도 하고, 드라마에 나왔던 가게도 기웃거려 본다. 전망대를 돌다가 친한 동생을 만나서 신기했다. 가파도도 역시 제주였다. 그녀가 "언니랑 형부는 진짜 둘이 잘 다니네. 너무 좋다." 막 호들갑을 떤다. 이럴 땐 뭐라 말할지 난감하다. 친구들이랑은 시간 맞춰 같이 다니기가 쉽지 않다. 남편은 시간 맞추기도 같이 다니기도 편하다.
사람이 많이 있는 구옥의 오래된 가게가 맛집일 듯했지만, 유채꽃 만발한 정원이 있는 새로운 가게에 끌렸다. 맛은 그저 그래도 유채꽃을 보며 먹는 것은 즐거웠다. 막걸리는 잘 못 먹는데, 가파도에 갔으니 파전에 청보리 막걸리를 시켰다. 남편은 술을 못 마셔서 나 혼자 마시며 기분을 냈다. 아무래도 맛보다는 분위기이다.
배를 타기까지 아직 여유가 있어서 카페에 앉아 바다를 보며 커피를 마셨다. 가파도가 우리를 가둬 놓아서 고마웠다. 형제섬도 한라산도 송악산도 산방산도 신비롭게 보였다.
"가자." 30분이면 일어나는 그가 못참고 말했다.
"어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
"그냥 좀 걷자." 걷는 거 싫어하는 남편의 말에 카페를 나와 청보리를 보며 조금 걸었다.
4시 50분. 줄을 서고 배를 탄다. 하루를 실컷 즐겼고 제주에서 50년을 살아온 우리 부부에게는 익숙한 곳인데도 마치 여행지에서 돌아가는 것처럼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엔가 오늘의 시간을 또 추억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