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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set엄마 Nov 08. 2021

망막박리 수술후기 1

내가 다 껴안을 필요는 없다

작년 이맘 때 마음이 참 힘들었었다. 

벌써 그 가을이 다시 한바퀴를 돌아서 오고 그 일 년 사이에 나는 조금 더 가벼워졌다.  수술 후 한달이 지나도 시력은 돌아오지 않아서 잘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한 쪽 눈은 영영 앞을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건 아닌지, 그러면 나는, 우리 아이들은, 우리 부모님은 어떻게 이 사실을 받아들이실 지 막연하고 두려웠다.  통상적으로 망막박리 수술 환자들은 수술 후 망막이 견고하게 다시 붙을 수 있도록 최대한 엎드려 생활하기와 엎드려 자야한다고 수술 전에 안내를 받는다.  수술 후가 더 고통스러울수 있는 수술이라고 들었으나 막상 닥치니 더 고통스러웠다.  수술 후 눈 안에서 예상치 못한 출혈로 나에게는 갑절로 힘든 회복이 계속 되고 있었다.   눈 속에 피가 고여있으니, 시야는 확보 되지않고,  피 때문에 사실상 주치의 선생님도 느낌으로 나의 눈 상태를 관찰하실 뿐이지 정확한 상태를 파악하기 어려워 하셨다. 피를 가라앉히기 위해 병원진료, 식사와 화장실 가는 것 외에는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밤에는 앉아서 잠을 자야 했었기에 밤이 되는 게 무서웠다.   우리 눈에는 마치 하수구와 같은 기능을 하는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을 눈물보다 농도가 짙은 피가 빠져나가는 상황이 되니 농도가 짙은 피는 이 구멍을 종종 막히게 했다. 눈 안에 하수구가 막혀있어서 배출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게 되니 안압이 급격하게 출렁이기 시작하였다.  안압을 가라앉히는 안약을 쓰고, 매일매일 병원을 가서 상태를 확인 받았다.  개선되지 않을 경우 두 번째 수술까지 고려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피를 제거하기 위해 다시 수술을 하기에는 득보다 실이 크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그저 원활하게 피가 가라앉고 빠져줄 수 있도록 나는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밤에도 똑바로 앉아서 잠든 가족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에 견디고 또 견뎠다. 

 

며느리는 무슨 죄

힘든 나의 회복 기간 중 시아버님 역시 병원에 입원 중이셨다.   아버님의 병세 또한 크게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는 답답하면서도 힘든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간병인을 고용하고, 어머님은 주로 낮시간동안 병원을 방문하여 아버님을 돌보셨다.  차도가 크게 없는 남편을 간호하는 답답한 심정을 지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어머님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머님은 차도가 없이 병원에 누워있는 남편을 바라보기 너무나 괴로우신 나머지 아들 뒤에 숨어서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하셨다.  처음엔 “너도 아픈데, 내가 너희 집에 오기가 죄스럽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우리 집에 오셔서 일주일을 머물다 가셨고, 그 이후로는 주기적으로 자연스레 오셔서 아버님 병원 방문 하시는 날보다 우리 집에서 지내시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하루는 새벽에 출근 하는 작은 아들 앞세워 기어이 아침 식사 전에 오시기도 했다.  우리 집에 와야 본인이 식사도 하실 수 있고,  잠도 잘 주무실 수 있다며 또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지내셨다.  나는 더딘 회복으로 신경이 굉장히 날카로운 상태였는데, 어머님의 기습적이고 본인의 권리인 듯 들어오시는 방문과 머무시는 날들이 길어지수록 예민해져만 갔다.   자연스럽게 나와 남편의 관계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이어지고, 남편은 어느 날은 나를 이해하는 듯 하면서도 또 어느 날은 굳이 그렇게 까칠하게 굴 필요는 없지 않느냐라는 양면적인 입장을 보였다. 여름에 내가 어머님께 최선을 다해드렸던 나의 호의는 마치 어머님의 권리가 되어버린 거 같아서 너무너무 속상했다. 

 

누구도 너에게 강요한 적은 없어

난 그동안 대단한 착각을 하고 살았었다.

내가 아니면, 회사도, 가정도, 시댁 일도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말도 안되는 착각을 하며 모든 걸 끌어안았었다.  내가 그렇게 쓰러졌지만 회사도 가정도 시댁 일도 처음에만 조금 불편했을 뿐 그럭저럭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나는 이 모든 일들이 나에겐 버겁다고 불평하면서도 쓰러지기 전까지 놓지않고 있었던 것이다.  더 냉정하게 보자면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조금 더 내 자신에 집중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내 마음은 벌써 “이리 줘봐, 엄마가 해줄께”, “어머님 제가 할께요”, “내가 이미 다 했어”를 외치고 싶었지만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지켜봤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다들 잘 해내고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들에 우선 순위, 회복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리고 엄마로써 아이들의 양육, 가정을 꾸려나가 는 일, 회사 업무를 우선 순위를 매겨서 처리하기로 마음먹고 실행에 옮겨나갔다.  물론 계획 대로 모든 것이 이뤄지는 것은 이니였지만, 그동안 내 스스로 나를 누르고 있었던 수 많은 의무와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는 내는 작업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연말이 다가올 즈음에 일상에 무리가 없을 만큼 회복되어서 복직을 하였다.  감사하게도 너무나 많은 분들이 걱정해주시고 배려해주셔서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다시금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고, 큰 어려움 없이 이어나갔다.

 

정기검진일

새해가 되어 안과 정기 검진일이 다가오는데, 이상하게 수술한 눈이 잘 보이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지하도에 내려가면 어지러워서 똑바로 걷기 어려웠다.  

왜 이러지… 힘들게 이겨냈었던, 두려움이 다시 한번 나를 덮쳤다.  정기 검진일에 나는 두번째 수술을 권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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