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을 살아보니 내가 유별나도 보통 유별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된다. 누구든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잠시라도 거닐어 본다면 쉽사리 길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 설계가 복잡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본격적으로 복잡해지기 시작한 것은 21살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내 의지로 책을 집어 든 것은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학교 공부가 하기 싫어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사고의 지평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전에는 닿아본 적이 없는 곳까지 생각이 번지기 시작했고, 모든 사물들의 의미가 새롭게 재편되었다.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이 있다. 모교에는 정문부터 도서관까지 약 600m가량 일자로 죽 늘어진 은행나무 거리가 있었다. 20살의 가을은 은행이 뿜어내는 악취뿐이었지만, 21살의 가을은 노랗게 물든 단풍잎에 마음이 저릿할 정도였다. 일 년 사이 달라진 것은 내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뿐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알면 알수록 삶은 미궁 속으로 빠졌다. 말수가 급속도로 줄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친구들은 만났다 하면 왜 이렇게 말이 없냐고 묻기 일쑤였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내가 아는 유일한 사실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세상 일에는 어느 것 하나 완전한 것이 없었다. '썰전'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며 유시민 전 장관이나, 박형준 교수처럼 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들은 도대체 얼마나 알고 있기에 이토록 선명할 수 있는 것인가. 내 삶은 혼돈 속인데 이들의 머릿속에는 저울이 하나씩 있어 모든 것들을 가늠하는 듯했다.
30대 초반에는 나도 제법 많이 안다고 느껴 고집을 가졌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는 내 머릿속에도 작은 저울이 하나 있어 이것은 이것이다, 저것은 저것이다 분별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고집이 아니라 아집이었다는 것을. 저울을 없애버렸고, 삶이 다시 미궁 속이다. 그러나 20대와 다른 것은 이 미궁에서 굳이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면 삶은 원래 출구 없는 미궁 속이기 때문이다. 미궁 속에서 벗어날 생각은 안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하니 주변 사람들은 이런 날 답답해한다. 그들에게 난 위태로워 보인다. 불안정한 것이다.
부인할 수 없다. 나는 불안정한 사람이다. 이것은 고백이고, 어쩔 수 없는 수용이다. 난 '기준'을 가지고 보면 별로인 사람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