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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목 Aug 19. 2022

펼쳐지는 삶, 그리고 사랑

에밀 아자르 작『자기 앞의 생』을 읽고


'사랑해야 한다.'

책은 이렇게 끝난다.


갓난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목청껏 우는 이유는 고통으로 점철된 세상 속에 강제로 던져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우스갯소리로 하는 걸 좋아한다. 삶은 고통 속이다. 끊임없는 고통. 나와는 다르게 천상병 시인은 이 삶을 소풍에 비유했는데, 365일 소풍 가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 또한 행복이라는 것은 소풍처럼 일 년에 한, 두 번 찾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삶을 소풍에 비유한 건 아니었을까. 물론 아니었겠지만 꼬인 나는 그리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다. 


모래가 잔뜩 섞인 밥알을 씹는 것처럼 삶이 너무 불편하다. 삶에 닥치는 고통과 그 가운데 이따금씩 느끼는 편안함 감정과는 별개로 존재적 허무가 나를 자꾸 좀먹는다. 그러니 어찌 되든 허무는 나를 좀먹는 것이다. 언제 끊어버려도 아쉽지 않을 삶이 꾸역꾸역 이어진다. 왜 일까. 그러고 보니 사랑이다.

얼마 전 부모님과 식사를 하다가 부모님께 여쭈었다. "여태 살아오시면서 언제가 가장 행복하셨어요?" 어머니는 '지금'이라고 답하셨고, 아버지는 '누나 결혼식 때'라고 답하셨다. 어머니의 답변을 듣고 거듭 물었다. "아이, 장난치지 말고 진짜 언제가 가장 행복하셨어요?" 어머니는 끝까지 '지금'이라고 답하셨고, 나중에는 카톡까지 보내셔서 그것이 진심임을 밝히셨다. 



엄마는 내게 묻는다. '너는 언제가 가장 행복했어?' 나는 '첫사랑을 했을 때'라고 답했다. 행복의 순간에 '사람'이 있다. 그리고 '사랑'이 있다. 아, 삶은 사람이구나. 그리고 사랑이구나. 인간은 사랑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존재구나, 하고 나는 깨달았다.


삶이 펼쳐진다. 누구에게나. 봄이 되면 새 생명들이 돋아나고, 겨울이 되면 모든 생명들이 잠시 생장을 멈추는 것처럼 삶은 그저 펼쳐질 뿐이다. 고통은 그곳에 피어나는 꽃이다. 못난 꽃. 행복도 반드시 피어나는 법이니 좌절할 건 없다.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해야 한다. 그것만이 고통과 허무의 해독제가 될 터이니. '사랑했더니 더 고통스럽던데요?' 그럼 또 하는 것이다. 다른 존재를. 다른 사람이든, 자식이든, 고양이든, 들꽃이든, 뭐든 말이다. 


사랑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가장 의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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