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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목 Sep 15. 2022

여백을 획득하는 일

현대인의 삶이 가득 차있다. 서로 더 채우려고 안달이 나있으니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하는 이가 없다.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만, 끝이 없는 자유에 대한 대가는 끝이 없는 책임이다. 책임은 무거운 것이다. 사람들은 자유를 칭송하지만 그 올가미에 본인의 다리 한쪽이 걸려있다는 사실을 쉽사리 눈치채지 못한다.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말한다. 이것이 바로 '강제된 자유'라고.


번아웃이 된 지 오래지만 이 사회는, 그리고 서로를 감시하는 매서운 눈들은 힘차게 달리다 지쳐 쓰러진 말에 호된 채찍질을 가하듯 가혹하기만 하다. 다시 뛰고 싶은데 몸속에는 한 줌의 에너지도 남아있지 않은 듯하고, 마냥 지쳐  쓰러져 있자니 끝없는 우울감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 속에서 현대인들은 고뇌하고, 심한 경우 자살을 택해 아직 펼쳐질 것이 많은 삶에 강제로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성과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세태 속에 타자와의 관계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다. 타자와 세상과의 관계가 소멸된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오직 아(我)와 이기심과 욕망뿐이다. 성과를 위해 스스로 노예 됨을 자처한다. 비로소 완전히 마모될 때까지 스스로를 착취하는 것이다.


성과 달성과 욕망의 실현으로 인한 행복은 찰나이다. 그 행복은 금세 소멸되고, 그 자리엔 결핍의 씨앗이 자리 잡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씨앗에서는 다른 목표와 다른 욕망이라는 이름의 새싹이 움트기 시작한다. 찰나의 행복을 위해 다시 영원한 불행 속으로 스스로를 내몬다. 이 고리를 끊어버리고 싶지만 나 또한 이 사회를 움직이는 작은 톱니바퀴일 뿐이다.


그래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최대한의 여백을 획득하려 한다. 하루에 한 시간 물속에 몸을 담그고는 무념무상으로 열심히 팔을 휘두른다. 얼마 전부터는 시를 읽기 시작했다. 종이 위에 넉넉한 여백을 남기곤 소란스럽지 않게 자리 잡은 몇 글자가 부족하지 않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오히려 좋다.' 그 누구보다도 타인, 그리고 이 세상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이 아닐까.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삶을 살아내지만 이들이 사는 세상은 더 느리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것 같다. 시를 읽어보기로 한 이유다.


오늘 하루도 조금 더 자세히 보아야지. 오래 보아야지. 모든 걸 그리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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