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떠난 부부 여행지 '국제도시 서울'

by 오늘을 살다

결혼 후 17년 되던 해였다. 여행을 제안했던 사람은 나. 결혼기념일도 아니고,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아이들이 엄마 아빠 없이도 하룻밤 지낼 만큼 자란 것 같았다고나 할까. 플랜맨 인 남편과 다르게 나는 좀 즉흥적인 인간이다. "우리 둘만 여행 한 번 갈까?" 물었더니 웬일인가 싶게 남편도 흔쾌히 좋다고 해서 시작된 여행이었다.


그럴싸한 곳이 없을까 고민했지만 최소한의 경비로 최대한의 효과를 보기 위한 장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생각해 낸 '발상의 전환'. 서울구경. 생각해보니 서울에 5년을 살았어도 구경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남편과 둘만의 여행은 결혼 후 처음이었으니 장소가 어디든 낯설고 새롭지 않을 수 있으랴.


교통지옥 서울에서 최대한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는데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 역으로 들어서자 신비한 일이 벌어졌다. 익숙한 풍경들이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자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지금껏 살아왔던 우리 집을 손님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지하철 안에 이런 게 있었네. 지하철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저렇구나.' 내가 새롭게 만난 건 '한국의 지하철'과 '지하철 속의 한국인'이었다.


첫 번째 장소는 이태원. 주한 미군을 비롯한 외국인이 가장 많은 곳이니 서울에서 가장 외국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쭉 뻗은 길 양쪽에 개성 있는 가게들이 외국어로 된 간판을 달고 늘어서 있었다. 한 낮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지만 밤이 되면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할 것 같았다. 골목으로 들어서니 알록달록한 벽화와 숨어있던 이쁜 가게들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아이들도 봤으면 좋아했을 텐데'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이 생각났다.


허기가 느껴졌을 때 베트남 음식점에 들어가 반쎄오와 쌀국수를 시켰다. 라이스페이퍼와 상추 위에 고기가 들어있는 부침개를 야채와 함께 싸서 소스에 찍어 먹는 반세오가 정말 맛있었다. 다음에 아이들이랑도 함께 먹으려고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외국 음식까지 먹으니 여행 온 기분이 더 느껴졌다.


두 번째 여행지는 서울 하면 빠트릴 수 없는 관광지 남산타워. 케이블카를 타려고 줄을 섰다. 아이들 없이 둘만 있으니 낯선 느낌이었다. 데이트하는 기분이라기엔 설렘이 없어 맹숭맹숭하기도 했지만 뭐 '이렇게 둘이 다닐 수 있을 정도면 다정한 부부네'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타워에 오르니 서울 야경이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반짝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참 좋았다. 이런 것이 여행의 특권이 아닐까.


1박을 하러 명동으로 가 저녁식사를 하려는데 외국여행객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지하로 들어가는 식당 앞에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소문난 맛집인 듯 보였다. 우리도 줄을 서고 싶었으나 배는 너무 고프고 마침 맞은편에 같은 메뉴의 더 럭셔리해 보이는 고깃집이 있기에 호기롭게 들어갔다. 가격에 당황했으나 날이 날이라 그런지 남편이 그곳에서 먹자 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하는 마음에 음식을 주문했는데 맛은 없고 비싼 인테리어 구경만 하다 나왔다. 밖에 나와 명동거리를 구경하다 길게 쭉 늘어선 길거리 음식에 시선이 꽂혔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후식 먹어야지?'하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평소처럼 남편이 핀잔을 주며 "금방 밥 먹었는데 또?"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나, 내가 하나만 먹자 먹자 졸랐더니 못 이기는 척 그러자고 했다. 내가 픽한 음식은 기름이 좌르르 흐르는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 남편이 얼마예요? 하고 주인에게 물으니 "비싸요"라고 대답했다. 허걱. 우리 남편 짠돌이인 거 어찌 알고, 관상도 좀 보나보다. 조금 기분이 나빠진 남편이 다시 가격을 물으니 역시나 비쌌다. 다른 곳으로 걸음을 돌리는 우리 남편. 나는 이때다 생각하고 남편을 열심히 놀렸다. 기분이 좋았다.


다음날 우리는 남산 한옥마을을 찾았는데 나는 그곳이 TV에서 많이 보던 한옥마을인 줄 알았다. 이번엔 남편이 나를 놀렸다. 상관없다. 그럴 수도 있지. 온 김에 구멍 뚫린 선비 등신대에 남편 얼굴을 내밀게 하고 사진을 찍어주고 한 바퀴 빙 돌며 구경을 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 소문으로도 못 들은 것 같았는데 의외의 수확이었다.


이어 길 공사가 한창인 북촌 한옥마을에 가서 구경도 하고 필리핀풍 가게에서 열대음료랑 코코넛 맛 과자를 먹었다. (코코넛 과자가 너무 맛있어서 두 봉지를 사 왔는데 우리 동네 마트에 똑같은 과자를 더 싸게 판매 중이었다.) 이어 TV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던 건물이 이쁜 중앙고등학교에서 사진도 찍고, 야외 정원이 넓은 정독도서관 식당에서 싸고 맛있는 점심까지 먹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직장이 서울인 남편은 하루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내는 사람이다. 그에게 이번 여행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서울의 이면을 볼 수 있었고 색다른 서울을 경험할 수 있어 인상 깊은 여행이었다고 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재발견'이랄까. 그러나 나는 자주 찾던 친구 집이라도 파자마 파티를 하면 달라 보이는 것처럼 여행은 뭐니 뭐니 해도 1박 이상을 해야 제 맛이 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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