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라면 끓이던 날.
날씨가 좋은 어느 봄날. 가족들에게 주말에 다 같이 야외로 나가 맑은 공기도 쐬고 준비해 간 도시락을 먹으며 산책도 하자고 미리미리 이야기해놨었다. 그러나 모든 준비를 끝낸 후 막상 외출을 하려 하니 초등학교 3학년이던 둘째가 갑자기 나가기 싫다고 딴지를 걸었다.
외출이 싫은 이유 : 옷 갈아입기 싫어서.
학교 갔다 오기 무섭게 집에만 오면 훌훌 겉옷은 벗어던지고 속옷만 걸치고 살던 아이다. 어쩌다 친구가 밖에 나와 함께 놀자고 연락이 와도 옷 갈아입기 싫어서 거절. 학습지 선생님이 방문하시는 날에도 옷 갈아입기 싫어 내복 차림으로 수업. 엄마 너무 부끄럽다고, 그건 예의가 아니라고 선생님 오시는 날만이라도 제발 옷 좀 제대로 입고 수업을 받으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꿈쩍을 않던 녀석이었다. 어리고 철없어 그렇겠지. 크면 안 그러겠지 맘을 다스리던 때였다.
이 녀석은 어릴 때부터 그랬다. 얼마나 고집이 센지. 안된다고 하면 얼마나 큰소리로 떼를 쓰며 울어대는지 감당하기 힘들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한번 끌려다니기 시작하면 끝이다 생각했던 나는 기싸움에서 절대 질 수가 없었다. 성심 성의껏 울고 있는 아이에게 한 톤 다운된 목소리로
"엄마는 네가 울어도 해줄 수가 없어. 울고 싶으면 더 크게 울어봐!"
라고 말할 때마다 녀석도 엄마의 기싸움에서 절대로 질 수 없었던지 청개구리 같이. 무조건 엄마의 요구에 반항하고 싶은 마음에.
"시러~~!!"
라고 소리치며 바로 울음을 뚝 그쳤다. 예쓰~!!!
그날도 이 녀석 고집 때문에 계획해놓은 가족 나들이를 망칠 수는 없었다.
"우린 나가서 맛있는 점심 먹고 어쩌면 저녁까지 먹고 올지 모르니까 너는 그렇게 나가기 싫으면 집에 있어. 그런데 집엔 먹을게 아무것도 없으니 배고프면 옷 입고 과자를 사러 가든지 너 혼자 알아서 점심 저녁 챙겨 먹어."
라고 일러두고 과감히 집을 나왔다.
빨간 풍차가 이쁘게 돌아가는 호숫가 잔디 위에 돗자리를 펼치고 준비해 간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집에 홀로 남겨진 둘째가 걱정이 되었지만 배 고프면 연락 오겠지 한번 힘들어보면 담부턴 좀 고분고분해질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역시나 오후가 되자 전화가 왔다.
"라면 어떻게 끓여?
"라면? 라면 봉지 뒤에 보면 어떻게 끓이는지 적혀있어. 잘 찾아봐"
"알았어. 끊어."
(찰칵-뚜-뚜-뚜-)
친정아버지가 다치셨을 때 내가 일주일 동안 병원에 가 있느라 낮에 저희들끼리만 집에 있었던 적이 있다. 언니랑 둘이서 인터넷을 검색해 전자렌지를 돌려 달걀찜도 만들어 먹었었고, 평소 달걀 프라이 정도는 혼자 해 먹을 수 있어서 가스불은 켤 수 있었지만 라면은 처음인데... 혼자서 잘 끓여먹었을까? 걱정이 됐다. 못 끓여 먹으면 주린 배를 안고 지금쯤 가족들 따라나서지 않은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럼 이제 다음부턴 무조건 따라나서겠지 기대하며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애써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라면 먹었냐 물었다.
"먹었어."
퉁명스레 대답하는 우리 둘째. 주방에 가보니 가스레인지 위에 우리 집에서 제일 큰 냄비가 올려져 있고 뚜껑을 열어보니 그 큰 냄비에 라면 국물이 한가득이다. 그래도 배는 고팠는지 면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다 건져먹었구먼. 이제 엄마 없어도 굶어 죽진 않겠다. 에구 다 컸네 다 컸어. 그 이후 라면 끓이는 능력을 가지게 된 우리 둘째.
시련은 아이를 자라게 하는 힘이 있나 보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