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있는 집을 포기한 이유

by 오늘을 살다

무덥고 축축한 날씨가 끝을 모르고 이어지더니 비가 그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쨍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빗물에 씻기 운 세상은 침침해졌던 내 시력이 회춘이라도 한 듯 뽀도독 소리가 날 듯만큼 깨끗해 보였다. 오래 잊고 지냈던 낡은 필름 한 장을 벗겨낸 것처럼. 이렇게 세상이 맑아 보일 수도 있구나. 감탄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날이다. 스멀스멀 올라왔던 우울감은 깊고 푸른 하늘과 새하얀 뭉게구름, 싱그런 초록 산등성을 바라보기만 해도 초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 공기 속에다 우울증 치료제를 촥촥촥 뿌려 놓은 것처럼.

오늘은 기필코 다용도실에 쌓여있는 빨래 거탑을 해치워야지. 그동안 벗어 놓은 빨랫감이 차곡차곡 쌓이더니 급기야 당장 갈아입을 속옷마저 바닥이 났다. 급한 대로 아이의 속옷까지 몰래 꺼내 입던 중이었다. 크기가 작아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족끼린데 뭐 어떤가. 세탁기가 과로사하는 건 아닌가 싶게 연거푸 돌렸다. 빨래 건조대에는 더 이상 젖은 옷을 널 수가 없어 거실 천장까지 주렁주렁 빨래가 달렸다. 빨래 풍년이었다. 이런 날은 해 잘 드는 마당이 그립다.


우리 부부는 나중에 아이들이 자리를 잡고 남편이 퇴직을 하면 지방에 살면 어떨까 생각했다. 집값과 생활비가 비교적 적게 들 테니 조금이라도 더 여유롭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한 번씩 지방에 내려가면 처음 만난 낯선 이에게도 다정한 말 한마디를 건네 사람들을 보며 여유로운 정이 느껴졌는데 남편도 그런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단다. 지방에 내려가 살게 되면 이동식 주택이라는 게 있는데 가격도 저렴하고 요즘은 이쁘게 잘 나온다는 남편의 말에 나는 여러 가지 나무들과 꽃들을 심어 계절마다 꽃을 볼 수 있으며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손가락은 걸지 않았지만 남편은 "그러자"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간. 봄이 오면 우리 집 마당에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복사꽃, 살구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짜릿한 봄맞이가 될 터이다.

남편에게 그 기억을 떠올리며 마당 있는 집 이야기를 꺼냈다. 근데 갑자기 "우리 그냥 편하게 아파트에서 살자. 집 관리하려면 힘들어. 자기가 할래?" 한다. 어라, 이게 무슨 말인가. 그동안 꿈꿔왔던 복사꽃. 살구꽃 핀 마당이 우리의 계획에서 급히 보류되었다. 햇볕으로 소독된 바삭 마른빨래도 함께. '왜 말을 바꿔? 약속했잖아. 마당 있는 집에 살기로. 계절마다 꽃을 볼 수 있는 나무도 심고, 텃밭에 싱싱한 채소도 심어 수확하면 나눠먹자 했잖아! 응? 응!' 하고 닦달하지 않았다.

서너 달 깔끔하고 정갈할 우리의 마당은 서서히 잡초들이 자라 머리를 풀어헤치게 되겠지. 그 후 내 시선이 닿으면 어김없이 '언제 할 거야? 이 잡초들 언제 뽑아줄 거야?' 독촉을 하겠지.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알았어. 이따가 해 줄게. 오늘은 너무 덥잖아. 내일은 약속이 있어, 모레는 책 반납하러 가야 해. 안 그러면 연체야. 미안. 안 바쁠 때 할게. 안 바쁠 때...' 어여뻤던 나의 마당은 어느샌가 마당에 드러누운 채 떼쓰는 빚쟁이처럼 굴 것이고 나는 미루고 싶을 때까지 힘껏 미루게 될 것이다. 안 봐도 뻔하다. 그러나 마당 있는 집을 보류한 것은 내가 아니다. 고즈넉하고 조용한 시골집. 아름다운 복사꽃, 살구꽃, 해 잘 드는 마당을 보류시킨 것은 남편이 먼저다. 나의 게으름 때문이 아닌 것이다. 아유 다행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애견과 남편